후기/워홀

25년 3월 마지막 일기 (03.27~03.31)_ 작은 곳에서 경험하는 큰 세계

킹쓔 2025. 3. 3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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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7.목 [워홀+240]_열 일하는 외노자

 

 도서관은 도대체 언제 문 여는 거냐고요… 맨날 반납도서 들고 왔다 갖고 가기를 반복. 시청에 전화 헸더니 가스 사고
담당 부서만 근무 중이란다. 오 디어…

 이번 달 월세도 없지만 카페는 가고 싶은 외노자. 도서관이 문 닫아서 갈 곳이 없다는 핑계로 네로를 한 번 와봤습니다.이젠 샷 반만 넣고 나머지는 우유로 채워 달라고 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 번 말 못해서 주는 대로 먹던 어두운 과거 안녕!

 브레이크 두 시간 동안 알차게 영상 콘티를 짰다. 커피 덕인 건지, 제법 기획력이 는 건지, 마감에 쫓겨서인지 집중이 아주 잘 됐다. 아니면 인원이 여섯 까지 늘어나면서 부담감이 커서 더 그랬을 수도 있고.

날로 늘어가는 사진 실력

 저녁 때는 지난 번 기획했던 신메뉴를 테스트했다. 공모전 할 때부터 느낀 거지만, 획기적인 어떤 걸 발명하는 것 보다 기존 걸 잘 활용하여 그럴 듯 하게 내놓는 게 더 어려운 것 같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으니까.

신메뉴 개발 중/ 짐 한 보따리 퇴근 길

 런던에서는 조금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선 분명 그럴듯한 직업에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그게 세상을 맞게 살아가는 법이라고 배웠는데- 영국에선 내 소속조직은 더 작아졌고, 급여도 더 작아졌다. 아이러니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도전하고 더 많이 배우고 있다는 점 인 것 같다. 


03.28.금 [워홀+241]_ 사부작대는 하루

 

 왜 이렇게 피곤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잘 까 싶었더니 드디어 그분이 오셨다. 하- 좀 만 늦게 오지.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서 호르몬 덩어리들을 몸에 이고 점심까지 사부작 거리며 일을 했다. 

  오후엔 유진이 놀러왔다. 거리가 꽤 있는 데도 여기까지 놀러 와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사실 와서도 내 할일 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다. 그래서 좀 바래다 주려고 했다. 바깥 산책도 할 겸. 가는 길에 이러다 사장님 만나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정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장님을 만났다. 이 정도면 거의 야생에서 마주치는 포켓몬이 아닐까 싶다. 

아빠야가 준 곱창 돌김

 집에 와서는 지난 번 한국에서 가져온 김을 구웠다. 귀찮아서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오늘은 꼭 하고 싶었다. 요 몇 주간 계속 일만 하다 보니 컴퓨터 앞에는 그만 앉고 싶었다.


 03.29.토 [워홀+242]_ 처음은 다 그런거야

 
 드디어 사장님책을 다 읽었다. 한 달 동안 미루고 미뤘던 과제라 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피곤 한데 또 그냥 잠들기는 그래서 집에서 노작거렸다. 미룽씨가 준 윷놀이도 혼자 해보고, 공기 놀이도 하면서 그리운 고국을 그려봤다.

드디어 다 읽었다/ 그리운 한국/ 신발 빨래 총 집합

 점심 땐 밀린 집안일을 했다. 그동안 지저분해진 실내화들도 빨고, 먹을 게 없어서 계란도 사러 갔다. 날이 너무 화창해서 어디 놀러 나가기 딱 좋아 보였는데, 저녁에 일이 있어서 그럴 수 가 없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영국 런던 날씨

 

토요일 채플 마켓 풍경

 

 

Chapel Market · Chapel Market, London N1 9EN 영국

★★★★☆ ·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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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번 품절이던 아이스랜드 계란 겟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데 스타벅스 직원이 신제품 시음행사라며 한 잔 건네길래 받았다. 스누피 뭐시기였는데 생각보다 달지 않고 맛있었다. 쿠앤크맛이라 더 내 스타일이었다. 알고 보니 지금 한국에서도 핫 한 음료라고 하대. 

스벅 한 잔 하고 가슈~

 

이번 주 식량은 김볶밥이닷

 저녁에는 촬영을 하러 식당에 갔다. 이번 촬영은 규모가 꽤 커서 부담이 좀 컸다. 출연진만 해도 6명이고, 로케이션도 두 곳 이상에, 찍어야 할 씬도 여러 장면이라 난이도가 쉽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사장님이 주셨지만 총괄 담당자는 나였다. 커진 스케일에 기획부터 촬영, 편집까지 도 맡아야 했던터라 좀 스트레스를 받았다.

쉽지 않았던 첫 촬영

 아니나 다를까- 촬영 단계에서부터 패닉이 왔다. 신경써야 할 건 너무 많았는데, 그 건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실수 하지 않도록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우선 가장 큰 문제 점은 현장관리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몰랐다. 게다가 출연진들을 관리하는게 쉽지 않았다.  배고픈 사람들의 은근한 재촉에 찍어야 할 씬들을 놓치기도 했다. 영업종료시간과 장소 이동때문에 시간의 압박도 있었다. 이 외에 동료직원들도 신경 쓰이고, 촬영을 도와주러 온 친구들도 챙기려다보니 좀 힘들었다.

 

 또 하나 느낀 점은 너무 남의 눈치를 봤다는 점이다. 내가 가장 최우선으로 놓고 생각해야 할 것은 최선의 결과물을 뽑아 내는 것인데, 나는 최대한 출연진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사장님의 지인이라 손님 응대 차원의 연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날 내 업무는 손님 접대가 아닌 영상 콘텐츠 담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왕좌왕하는 내게 라피는 말했다. " 수진, 네가 저들에게 친절한 건 좋아. 하지만 지금 너가 해야 할 일이 뭐지? 저들을 친절하게만 대하면 잠깐 좋은 사람은 될 수 있겠지. 하지만 네 작업물은 좋지 못할거야. 그럼 프로로써 네 평판은 떨어지겠지. 어떻게 영상 뽑을 지만 최우선으로 생각 해. 오늘 네 가 할 일은 그거야. " 

든든한 마보이들

  촬영이 끝나고는 인근 펍에서 한 잔 했다. 한껏 풀이 죽어있는 나를 보며 라이언과 라피는 원래 '처음은 다 그런거'라고 위로했다. 인터뷰 영상 같은 경우는 이제 경험이 쌓여 어렵지 않게 찍었는데, 이번 영상은 정말 쉽지 않았다. 만족스럽지 않은 작업 과정을 보며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사장님께 죄송했다. 나 때문에 멀리까지 와준 라이언과 시험 준비로 바쁜데 짬을 내준 라피의 시간을 낭비 한 것 같아 미안했고.

 

The Clerkenwell Tavern · 2 Exmouth Market, London EC1R 4PX 영국

★★★★★ · 호프/생맥주집

www.google.com

 

귀여운 내 절친들

 그래도 한 편으로는 좀 뿌듯하기도 했다. 이번 경험으로 많은 걸 배웠기 때문이다. 실수를 통해 더 준비해야 할 부분을 알았고, 신경쓰지 않아도 될 부분을 깨달았다. 또 하나 느낀 건, 그나마 이 친구들이 있어서 더 헤매지 않고 작업했던 것 같다. 촬영 씬을 놓칠 때마다 라피는 대체씬을 찾아오고. 라이언은 폐쇄적인 출연진들 속에서 분위기를 환기 시키려고 애썼다.  고마운 이들. 어쩌면 나한테도 비빌 구석이 있다는 그 사실이 오늘 배운 어떤 것 보다 더 든든하게 다가 오는 것 같다. 


03.30.일 [워홀+243]_드디어 100일

 

 "Be quiet! It's too late to be making a noise!"

 

 10월의 어느 새벽. 나는 당시 살던 옆방문을 열어 제끼면서 그렇게 외쳤다. 며칠 간 밤마다 들려오는 소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당시 거주하던 이웃의 무례함에 화가 제대로 쌓인 상태였다. 작은 소음에 폭발한 나는 참지 못하고 달려가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다.

 

 문 앞에는 이제 막 방에 발을 들인 소년이 보였다. 내가 알던 그 싸가지 없고 무례한 그 옆집 남자가 아니었다. 잔뜩 당황한 그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Sorry, but i just got here." 양 손에 가든 수트케이스를 가득 움켜쥐고. 그게 라피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훗 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날은 라피가 런던에 온 첫 날이었다. 난생 처음 밟은 외국땅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는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쫓아와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여자가 당황스럽고 황당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물론 나도 내가 실수한 걸 알아채자마자 당황스러워서 황급히 도망가버렸다. 그렇게 사과도 없이 방으로 돌아가는 뻔뻔함에 어이가 없기도 했다고 하고.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사이가 될 것만 같은 우리는 연인이 된 지 백일이 되었다. 크고 작은 몇 번의 다툼, 서로 다른 언어의 장벽, 멀게만 느껴지는 각자의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던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감성을 공유하며, 함께 추억을 만들고, 서로에게 닿아가는 날들을 보내면서. 

백일맞이 피크닉

  사람인연이라는 게 참 웃기고도 알 수 없는 거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그 쪼그만 꼬맹이랑 내가 이렇게 될 줄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런던에 와서는 정말 별 경험을 다 해보는 것 같다. 우리는 근처 그라운드로 산책을 나왔다. 서른 살이 다 넘어서 공원에서 이런 데이트를 하고 있다니. 대학생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간들이 꽤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

 

번힐 필즈 베리얼 그라운드 · 38 City Rd, London EC1Y 2BG 영국

★★★★★ · 공원묘지

www.google.com

 

라피가 가져온 저녁

 저녘엔 라피가 먹을 것 들을 갖고 왔다. 이드를 맞아 엄마 친구네 놀러간 그는 그녀가 바리바리 싸준 음식에 잔뜩 신이 난눈치였다. 매 번 나한테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했다며 이것 저것 들고 온 그가 좀 귀여웠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앞으로 그와의 인연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다. 우린 서로 너무 다르기도 하고, 외노자인 내 신분 특성상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이별을 마음에 염두해두고 산다. 그러면서도 헤어질 상황을 생각하면 곧잘 서글퍼지기도 하고.

 

 1년 후,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한 때의 추억으로 마무리 될까. 지금은 한 점에 놓여진 우리의 미래가 하나의 직선으로 변할 지 두 개의 평행선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분명한 건, 그와 함께했던 이 소중한 날들은 잊지 못할 것 같다. 


03.31.월 [워홀+244]_그대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돈이 또 다떨어졌다. 먹을 거 사먹을 돈도 집세 낼 돈도 없는데,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니라 별로 걱정도 안됬다. 이게 바로 외국생활하는 짬바인가.

로렌조의 이탈리아산 고추들과 보답음식들

 옆집 로렌조가 태국으로 여행을 갈 거라고, 화초에 물주기를 부탁하고 갔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잘 부탁한다고 먹을 걸 잔뜩 나눠줬다. 다 신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다음 월급날까진 잘 버틸 수 있겠다. 봐바 내가 걱정하지 말랬지? 

 

 매 번 이 땅에서 굶어죽을까봐 걱정하는데, 생각보다 굶어죽기도 쉽지 않다. 어제는 라피가 오늘은 로렌조가 음식을 들고와서 냉장고가 가득찼다. 당분간은 음식 걱정없겠다. 그러니 그대여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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