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4월 두 번째 일기 (04.07~04.13)_ 화창한 런던을 전합니다
04.07.월 [워홀+251]_ 평범하고 평화로워
오늘은 오랜만에 건강한 아침상을 차려봤습니다. 뭐 너무 많은 당류와 탄수화물 투성이, 단백질 부족인 거 나도 알지만. 그 전 식단에 비해서 나름 건강한, 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영국의 날씨는 무척 화창한 편이다. 비도 안 오고 흐리지도 않고, 며칠 째 맑은 하늘이 계속된다. 구름 한 점 없는 새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한 마음마저 맑아지는 기분이다.
런던은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도시이다. 클래식한 건물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유리 빌딩들은 해 질 녁 더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오래된 날들이 켜켜이 쌓인 이 도시에서 새로운 시간들이 도래함을 알려주면서.
지난 번에 가고 싶던 집 앞 공원도 뚫었다. 늘 가고 싶었는데 입구를 못 찾아서 헤맸었다. 사실 막상 들어와 보니 별 거 아닌데, 들어오기 전에는 그렇게 안에서 노는 애들이 부러워 보였다.
04.08.화 [워홀+252]_ 스콘 찾아 삼 만리
국물이 없는 라면을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먹고 있는 나... 점점 그의 취향을 닮아가고 있는 지도...
요즘 탄수화물 대 파티 중인 나... 늘 밝은 미래를 기다리며 눈치 껏 쪼그라들어 주기를 바라지만, 항상 자신감 있게 차오르며 예상을 벗어나는 내 체중. 요즘은 스콘이 또 그렇게 당긴답니다...
이거 먹겠다고 가게 세 군데 돌아다니며 1시간 동안 헌팅 다닌 나... 빵 쪼가리 하나 먹겠다고 이 바람에 잠바 하나 달랑 걸치고 다닌 거 실화인가요. 이 열정으로 공부했으면 하버드를 갔겠다...그치만 스콘+클로티드 조합 정말 탄수화물+지방 최강 조합이다... 앉은 자리에서 서 너 개 금방 해치워버렸네... 그래서 살은 언제 빼나...
04.09.수 [워홀+253]_내 안의 불씨를 날려버리길
드디어 택배 받는 줄 알고 기다렸는데, 또 차였다. 아저씨 오면 얼른 문 열어주려고 집 근처에서 대기 타고 있었는데 목도 마르고 화장실도 너무 가고 싶어서 근처 펍에 들어갔다. 온 김에 영국 썸머 드링크인 스프리츠 한 잔 마셔주고.
엄마랑 전화로 신나게 싸웠다. 그러고 또 몇 시간도 안되서 우리는 서로에게 사과를 건냈다. 누구보다 서로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기에. 아직도 내 안에는 불씨가 남아 있었구나. 누군가에게 성질을 내고 화를 낼 그런 불쏘시갱이들이.
04.10.목 [워홀+254]_ 니브랑 띵까띵까
오늘은 오랜만에 니브를 만나는 날. 알러지 투성이라 화장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오랜만에 외출이니 그냥 했다. 인조손톱도 붙이고 원피스도 입고. 그런데 네일 이거 사람들 왜 하고 다니는 거야. 이렇게 긴 손톱으로는 뭐 제대로 집기도 힘든데.
러셀 스퀘어 · Russell Sq, London WC1B 5EH 영국
★★★★★ ·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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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스퀘어 근처에서 그녀를 만나 근황을 나누고, 저녁에는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사장님이 디저트며 스타터며 이것 저것 챙겨주셔서 감사했다. 근데 니브는 그런 사장님께 눈도 못 마주치고 인사를 해서 웃겼다. 그녀도 나처럼 다른 인종들에게 둘러 쌓여있을 땐 꽤 나 긴장하는구나.
니브를 데려다주고는 라피에게 갔다. 그의 집 근처에는 자주빛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아니 그렇게 찾던 벚꽃스팟이 여기 있었잖아.
04.11.금 [워홀+255]_ 하얗게 불태웠다
한국에서도 안 하는 파테크를 영국에서 하고 있는 중. 무럭무럭 쑥쑥 자라라. 이렇게 1파운드 아끼고 스콘이랑 클로티드 크림 사는데 팡팡 쓰는 모순적인 행위를 반복 중입니다. 어제 남은 흰자 계란도 야무지게 써주고.
저녁에는 회식을 했다. 활기찬 이탈리아 단체손님때문에 넋이 빠져있던터라, 배가 안 고팠는데도 그냥 먹었다. 끝나고 나니 열두시가 다 되어갔다.
집 가는 길에 바에 붙어있는 광고지를 봤다. 언젠가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고 싶다는 라피가 떠올랐다. 생각나서 전화해보니 친구가 와인들고 왔다가 신나서 놀고 있었다. 아까는 보증금 못구해서 자전거 계약금 날리게 생겼다고 코박고 있더니, 귀엽구만.
뭐가 그렇게 맘이 급했는지 그 길로 라피에게 갔다. 몸은 피곤은 한데 보고는 싶고 그냥 그랬다. 카드 값 때문인지 아니면 향수병 때문인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랬던 것 같다. 지난 번 급작스런 한국행과 아죤 여행으로 이번 달 카드 값이 많이 나왔고, 일한 시간 대비 급료가 충분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문제를 보며 더 나아가지 못하는 내 자신이 쪼그라드는 요즘, 그가 필요했던 것 같다.
라피는 위험하게 밤늦게 찾아왔다고 혼내면서도, 또 내심 좋아서 성질도 제대로 못냈다. 그런 그를 보며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싶었다. 나는 언제나 철이 들까.
04.12.토 [워홀+256]_ 한가한 날에는 남친을 볶아봅니다
촬영 업무가 미뤄지는 바람에 주말이 조금 한가로워졌다. 대개는 평일날 촬영을 하고 그걸 주말에 콘텐츠로 만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조금 시간이 여유로웠다.
이런 날 만날 사람도 없어서 너무 심심했다. 축구와 숙취로 엎어져있는 라피에게 놀자고 보챘다. 휴 난 얘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요즘 너무 매달리는 날 보며 조금 한심하게 느껴진다.
04.13.일 [워홀+257]_화창한 날은 나들이가 필요해
집에 스툴이 필요해보였다. 때 마침 중고거래로 2파운드(3천원)에 나온 스툴이 보였다. 물건을 가지러 시내로 가는 길, 날씨도 좋으니 겸사겸사 테이트모던에 들르기로 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 · St. Paul's Churchyard, City of London, London EC4M 8AD 영국
★★★★★ ·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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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교 · Thames Embankment, London EC4V 3QH 영국
★★★★★ ·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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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 · Bankside, London SE1 9TG 영국
★★★★★ ·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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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는 하루 종일 옷차림때문에 꿍얼댔다. 미리 말해줬으면 제대로 갖춰 잆었을 텐데, 매일 예고없이 어디론가 데려가는 통에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온다고. 여기 테이트모던에 처음 오는 날인데, 이런 좋은 곳을 홈리스 차림으로 왔다며. 하 거참, 미술관이 작품감상하는 데지 패션쇼하는데냐구요.
전시관 구석진 곳에는 시꺼멓게 물든 작품 하나가 있었다. 화려한 다른 작품에 비해 단조로워 보여 크게 눈길을 크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던 라피는, 다른 그림들보다 유독 이런 모노톤의 그림들을 좋아했다. 여러 색채의 작품들 속에서 유독 이런 그림들이 더 흥미롭다는 그. 그 덕에 이게 고국의 작품이란 걸 깨달은 한국인. 이 런던에서 만나다니 제법 반가웠다.
군대에서 병원에 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그림을 만들었다는 김구림 작가님. 맨 오른쪽에 선명히 보이는 한글 이니셜에 또 한 번 마음이 잔잔해졌다.
중고거래때문에 급하게 관람을 마무리 하고, 약속장소인 옥스퍼드로 향했는데. 이게 왠 걸. 사정이 있어서 오늘 못 만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혹시 집 근처로 와주실 수 있냐고, 대신 의자는 무료로 나눠드리겠다는 연락을 받고는 고민이 됬다. 왠만하면 걸어다니던 라피를 버스까지 태워서 왔는데- 여기서 버스를 한 번 더 타야하는 거리였다.
그는 정말 나를 닮아있었다. 알겠다고 가자고 해놓고- 가는 길 내내 의자값보다 버스비가 더 든다느니 버스 안에 하루 종일 있어서 지루하다느니 꿍얼꿍얼 댔다. 그냥 버스 타고 런던시내 여행 잘 했나보다 하면 되는거지 참말로. 휴- 하지만 나는 알지. 그의 모습은 정말 내 모습의 일부이기도 한다는 걸...우린 정말 꼭 닮은 사람들이구나. 심지랑 수영이한테 꿍얼대던 나... 반성합니다. 정말 앞으로 나는 이러지 말아야지.
사실 배가 고픈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0시 이후로 4시가 다 되도록 아무 것도 먹은 게 없었으니 당연한 바이긴 하다. 주머니 사정이 팍팍한 탓에 외식을 하기엔 조금 무리라 그냥 테스코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세일 샌드위치랑 스시를 사 먹었다. 그래도 판매자님이 의자도 무료로 주시고, 먼 길 와주셨다며 보조배터리도 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역시 한국인이 최고야.
저녁엔 라피랑 폭삭 속았수다를 봤다. 숏츠로만 봐서 홀 에피소드를 보는 건 처음이였는데, 끝에 두 에피소드만 봤는데도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 아- 나 정말 이런 신파 싫어하는데- 동백꽃 작가님 정말 사람 울리는 재주 있으셔.
한국 드라마는 확실히 응축된 한국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모아니면 도' 설명하다 성임이가 준 윷놀이도 꺼내서 알려주고, 월드컵이랑 아이엠에프 얘기하다가 추억 여행 떠나게 된 나. 참말로 오늘도 일찍 자긴 글렀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