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수 [워홀+133]_ 먹을 복 터진 날
춥습니다 추워요. 누가 한국 겨울만 춥다고 했나요. 런던도 롱패딩 없으면 얼어 죽을 만큼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붑니다. 추운만큼 배도 더 빨리 꺼지는 요즘, 다행히 오늘은 먹을 복 터지는 날 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브레이킹때 뷰잉을 다녀왔다. 위치도 치안도 주변 편의시설도 방 크기도 가격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3개월치 월세를 연달아 지불해야 하는 계약 조건 하나만 빼고. 역시 좋은 집엔 까다로운 조건이 따르는 군.
뷰잉이 끝나고 주변을 좀 돌다가 일터에 일찍 갔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금방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열쇠를 가진 주방 스텝들이 오픈 시간이 다 돼서 도착하는 바람에 계속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촉박한 시간 탓에 끼니를 놓칠까 걱정한 사장님은 근처 식당에서 국수를 주문하셨지만, 그걸 모르는 주방에서 또 직원식을 만들어서 보냈다.
어쨋든 국수는 맛있었는데, 오픈 시간이랑 맞물려 제대로 먹긴 힘들었다. 양도 워낙 많아서 결국 다시 포장을 했고, 집에 양손 가득 두 개의 밥을 가져가게 되었다.
근데 집에 오니까 파르토가 또 케이크를 먹으라네. 달다구리 거부 할 수 있나요, 핑거케이크는 맛있었지만, 요즘 자꾸 밤에 뭘 먹어대서 걱정이다. 자기 전에 뭐 먹으면 암 걸린다던데, 요즘 술도 너무 많이 먹고 말야.
그래도 굶는 것보단 나으니까. 한국에서는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던 끼니 걱정 덕분에 과식을 합법적으로 용인하게 되네. 부족한 내 인내심보다 괜히 환경 탓을 한 번 해봅니다. 어쨋든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풍족했던 럭키비키 수요일이었다!
12.12.목 [워홀+134]_닥치는 대로 살아봅시다
영국, 여기 온 지 약 4.5 개월 째. 처음 도전한 타향살이인만큼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다. 그 중에 하나를 꼽자면 바로 <위기대처능력>이랄까.
대체로 규칙적이고 빠르고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여기는 굉장히 여유롭고(느리고), 경직되지 않은(다른 말로 체계가 없는) 시스템이 주를 이루는 게 내가 느낀 영국이다. 그리하여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하거나, 계획했던 일이 공중에 뜨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J들에겐 굉장히 스트레스지.
그래서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이 늘었다. 전처럼 안정적으로 갖춰진 조건에서 일 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전 날 혹은 당일 몇 시간 전에 촬영이 잡히거나 취소돼도 이젠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어떻게 보면 그게 진정 프로 다운 태도인 것 같기도 하고.
이번 촬영지가 멀지 않아서 굉장히 여유롭게 브레이크를 즐길 수 있었다. 요즘 굉장히 텐션이 떨어져보인다는 죠앤의 말에 공감하며 성당을 갔다. 구복( 求福)신앙을 선호하는 나라 출신이라 뭐라도 빌고 싶었는데, 딱히 생각나는 소원도 없었다. 간절함이 사라진걸까, 아니면 간절히 빌어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상실감에 굴복된걸까.
성당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스멀스멀 음식 냄새가 올라왔다. 식당에 오래 있다 보니 몸에 음식 냄새까지 베는 건가 싶었는데, 집에 와보니 옷에 빨간 국물이 묻어있었다. 젠장- 주방세제부터 세탁세제까지 총 동원해봤지만 냄새는 고약하고 지워지지도 않아서 여간 고생이었다.
싱크대에서 사투 중인 나를 보며 파르토가 라임이랑 소금을 묻혀서 닦아보랬다. 신기하게도 그게 효과가 있었고, 그 후로는 싹쓸이 스틱으로 마무리하니 한결 나아졌다. 완전 깨끗하다고 볼 순 없지만, 세탁소에 맡기는 거 없이 이 정도면 선방 했다 정도?
원래대로 라면 할일을 적당히 마친 후 자고 있었을 텐데, 또 계획에 없는 변수가 생겨 하루 마무리가 늦어졌다. 깔깔깔...그래- 이런 게 인생이지. 흘러가는 대로 두자. 닥치는 대로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12.13.금 [워홀+135]_선긋기 장인의 관계개선
시작의 발단은 어제였다. 이번 주는 수, 목 이틀을 풀로 일했고, 쉬는 금요일은 꼭 재밌게 보내리라 다짐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사갈이 내일 스케이트장에 가는 거 어떠냐고 제안했다.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몇 번을 거절했는데, 웬만하면 잘 물러나던 애가 꽤나 적극적이었다.
그래도 영국에서 보내는 첫 12월인데, 윈터원더랜드는 못 가더라도 스케이트라도 타고 싶어서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또 싸웠다. 뭐 서로 다퉜다기보다 일방적인 나의 화냄이었지만. 나도 그도 일 하던 탓에 서로 급할 때 연락이 안 됐는데, 그게 좀 꼬였다. 가격은 얼마인지, 몇 시에 만나는지, 갑자기 생긴 동행은 누구인지. 내 입장에선 그런 기본적인 걸 물은건데, 대뜸 질문이 많단다.
사갈 말로는 "사실 네 생일 선물을 미리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질문이 너무 많으니 그냥 서프라이즈는 포기"란다. 내가 지불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마치 내가 요청하지 않은 호의를 베풀어놓고, 그걸 따지는 까다로운 사람 취급 당한 느낌이랄까. 아니 내가 언제 생일 서프라이즈 해 달랬냐고, 난 강요 한 적 없다고, 이렇게 일방적인 생일 파티가 어딨어.
이런 기분으로 굳이 가고 싶지 않아서 답을 미뤘더니, 사갈이 전화를 해서 꼭 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얘도 좋은 마음으로 한 거겠지. 나쁜 마음이었다해도 뭐 어때- 스케이트장 비싸잖아.
서머셋하우스는 고흐의 자화상을 소유하고 있는 미술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옆의 카페도 예쁜 뷰로 유명하고. 또한 여기 스케이트 장은 겨울철 마다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인기가 많은 곳이다.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멋진 조명들이 마음을 선덕거리게 했다. 영화 <러브액츄얼리>에 등장하면서, 더욱 더 많은 연인들의 겨울 데이트 필수 코스가 됐고, 그만큼 티켓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킹쓔's 영국워홀 꿀팁! 서머셋하우스 아이스링크
- 입장료/ 26.50 파운드
(스케이트 대여료, 물품 보관함 포함)
- 인터넷 예약 가능. 45분 이용 가능
- Edmond j. Safra Fountaion Court. 매 시간 별로 입장.
- The waterhouse coffee shop (스케이트장뷰를 보며 커피 마시기 가능)
그러니까 이번에는 고맙긴 했다. 이렇게 귀한 경험은 얘가 아니면 못했겠지. 어제 그렇게 성질을 냈는데도 일단 참고 불러준 건, 나름 그 녀석도 참은 게 있다는 뜻이겠지. 아 물론 고맙긴 고마운 거고, 딱히 그가 준비한 선물이 완벽했다던가 그런건 아니다. 물론 1시간이 딱 끝나자마자 일하러 가야 한다고, 친구랑 같이 또 떠나버렸을 땐 또 시작이구나 싶었다. 물론 뭐 예상했던 일이라 딱히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고.
어쨋든 겨울철 런던을 방문한다면 서머셋하우스는 꼭 추천하고 싶다. 빅토리아앤알버트 뮤지엄이나 대영박물관처럼, 영국은 문화시설들이 시민의 삶에 잘 녹아있는 것 같다.
오전에 쇼룹에게 그런 충고를 들었다. "남자친구가 아니면 친구라도 만들라고, 여기서 홀로 지내기엔 너무 힘들거라고. 더 이상 사람들과 거리 두며 외롭게 지내지 말라고."
깐깐한 사감같은 그는 늘 그런식이었다. 그렇게 입고 갔다간 감기 걸리니 두터운 옷을 입어라, 세탁기에 먼지가 많으면 헹굼으로 돌려라, 쥐는 그렇게 무서워 할 게 못된다 등. 본인의 애정을 잔소리로 표현하는 사람. 이제 이런 얘기도 못 듣겠구나.
다음 달이면 떠날 생각을 하니, 모든 관계를 잘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고로 사갈이랑도 그냥 잘 지내려고 노력하고, 이 집 빅브라더인 미트라네 미코도 까주고, 이쉬타랑 사진도 찍었다. 내게 삐져있는 옆집 꼬맹이 녀석도 잘 달래놔야겠다 싶어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게 새벽 4시까지 갈 줄은 몰랐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그 애는 종종 나를 불편하게 한다. 사갈하고 얘기할 땐 영어만 잘했으면 어렵지 않을 말 장난 같은 질문들이지만, 파딘은 다르다. 정말이지 어떠한 궤변도 늘어놓지 못하게, 핵심을 꿰 뚫는 질문을 던진달까. 최연소 스텝은 역시 다르구만. 똑똑해.
그러게- 나는 왜 내 얘기를 하는게 서투를까, 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울까. 외롭지만 관계에 대한 책임은 지고 싶지 않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만 상처 받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은 뭘까. 혼자라고 징징대면서, 혼자일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일까. 누군가의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고 밀어내는 습관은 언제쯤 고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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