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3.화 [워홀+126]_ 주짓수 이즈 마이라잎
오늘은 라이언네 주짓수 가는 길. 그렇게 보고 있었는데 또 눈 뜨이고 코 베였네. 분명 디스트릭트라인을 탔는데. 이거 해머스미스라인이었구만. 넋 놓고 있다가 이상한 곳으로 떨어졌다...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내릴걸.
그래도 이젠 잘못 가더라도 당황하지 않는다. 노선도 보고 제법 짱구 잘 굴려서 목적지까지 간다. 영국 지하철은 인터넷이 잘 안 돼서 열차를 타기 전에 늘 노선도를 한번 체크해야 한다.
사실 시작 전에는 기분이 조금 꿀꿀했다. 아까 받은 요상한 속보 탓일까. 21세기를 지나고 20년씩 지났는데도 아직도 계엄령이니 뭐니 하는 걸로 나라를 흔들어 데 다니. 소수의 욕심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까지 피해보잖아. 환율은 곤두박치고 군대는 긴장하게 되고. 왜 그러는거야. 밤이라서 다들 연락도 안되는데. 사람 걱정되게.
아니면 파딘 때문일까? 집을 나서기 전에 파딘이랑 다시 정리를 했다. 좀 전에 일어나서 첫 끼를 먹으러 가는 길이라고 신 나서 떠들어 대는 그를 붙잡고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꽃은 받을 수 없다고. 충분히 생각해 본 결과, 우린 네가 생각하는 사이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애매하게 굴면서 받아주지도 않을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다시 말한다고.
찬 건 난데 왜 내가 더 속상하지. 이제 더 이상 달달한 순간은 기대할 수 없어서인가. 그래도 후회는 없다. 목 마른 상태에서 급하게 뭘 시작하고 싶진 않아. 당장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섣부르게 시작했다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던가.
한 시간이 넘게 걸려서 온 주짓수 수업은 정말 재밌었다. 한동안 런던에서의 삶이 조금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느껴졌는데, 내가 좋아하던 걸 다시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런 거였지. 그래 난 정말 주짓수를 좋아했다. 물론 다 까먹어서 가드 하나도 못 뚫었지만... 파트너들도 다 나보다 큰데 안전하게 대해주고 잘 놀아줬다.
끝나고는 라이언이랑 한 잔하고 헤어졌다. 운동 직후에 먹는 사이다는 정말 꿀맛이었다. 물병을 안 가지고 가서 목이 말랐는데 혈관에 당분이 쫙 퍼지는 기분이랄까. 대신 그만큼 회복도 더뎠다. 파딘 얘기하다 대화가 깊어져 얘랑 별 얘기를 다 한 거 같다.
수업이 너무 재밌어서 정기적으로 주짓수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무릎을 다쳐서 절뚝거리는 라이언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블랙벨트도 부상은 피할 수 없구나. 다른 코치도 어깨 부상으로 고생이라고 한다. 참나. 한국이랑 달리 노동직이라 몸 사리게 되네.
한참 헤맸던 오던 길과는 달리, 가는 길은 아주 빠르고 편안하게 잘 갈 수 있었다. 역시 돈이 짱이구만. 집에 오니 너무 피곤했다. 내일 일 가야 하는데 어쩌지.
12.04.수 [워홀+127]_ 한국에서 느끼는 일본, 해외에서 만난 일본인
어제 수업 끝나고 술 먹은 거 정말 후회한다. 덕분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회복도 못했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 처럼 너무 찌뿌둥하고 피곤했다. 그래도 일은 가야지.
오늘은 료코랑 같이 일을 했다. 료코는 석사를 마친 일본 여자애인데, 정말 내가 생각하던 순하고 부드러운 전형적인 일본인 여자애같았다. 얼마 전 본 인터뷰에서 합격을 받아 은행으로 취직을 했고, 다음 주면 마지막 근무를 선다.
우린 비티에스 얘기도 하고 일본 음식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방에서 대마초 피는 녀석들 때문에 겪는 불편함이나, 외국인 여자로써 겪는 애로사항, 연애 등 다양한 주제가 끊임없이 나왔다. 한국인으로써 일본에 좋은 감정을 같기 힘들지만 밖에 나와서 그렇게 반가운 건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다. 왜 이제야 만난거 니 료코...
오후엔 뷰잉을 다녀왔다. 집은 굉장히 맘에 들었는데 계약형태가 조금 껄쩍지근 했다. 부동산 없이 개개인끼리 거래를 하는데 없던 보증금이 갑자기 생기거나, 집세가 올라가는 등 공고에서 본 거랑 조금씩 달라져서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위치나 방 크기 등 좋은 조건이라서 바로 포기하긴 힘들었다.
물론 가스비나 전기세 등을 별도로 내야해서 부담스러운 점과 플메의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 때문에 더 고민이 됬다. 집에 오면 바로 자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막상 오니까 배도 고프고 잠도 안 와서 주방에 올라갔다.
부엌에 있던 파르토한테 물어보니 부동산을 끼는 게 좋을 거라고 한다. 쇼분은 내가 너무 순진해서 이용 당할까 걱정된다며, 우리를 두고 어딜 가냐고 말했다. 짜식들, 있을 때나 잘 해주지. 계속 잠이 안 온다. 내일 어쩌려고 그러니 정말.
12.05.목 [워홀+128]_ 피곤합니다만, 잘해냈습니다
요즘은 쥐가 더 극성이다. 전에는 싱크대 뒤로 숨어 다니더니, 이젠 아주 대놓고 부엌을 가로질러 다닌다. 새로 이사 온 메즈라는 쥐 문제에 대해 예민했다. 절대 쥐와 함께 살 수 없다며, 부동산이 나서지 않으면 시청에 신고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쥐가 얼마나 위험한지 열변을 토해내 던 그는, 방글라데시인들은 매우 위생적이라 쥐 문제에 민감하다고 했다. 아니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는 애들 중에 쥐 보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저 뿐이었는데요?
본인은 주거나 위생 관련 위법 사항에 대해선 전문가인 변호사라며, 앞으로 이 문제를 함께 해결 해보자며 걱정말란다. 한동안 공감 받지 못하던 이 common sense를, 이제서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제법 든든했다.
그렇게 메즈라가 난리를 친 덕분인지 조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15일까지 쥐 문제를 해결할 테니 계약 연장 여부는 그 때 가서 논의 해 보잔다. 이 아저씨야... 내가 집 알아봐 달라고 한 게 언젠데 미리미리 해줬어야지. 여기 온 지 반 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해결 안된 걸 무슨 수로 해결 해.
오후 근무라 충분히 쉬고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은근 잡일이 많아서 바빴다. 게다가 아침부터 엄마랑 한 판 하는 바람에 없던 기력도 쇠하고, 더 일하러 가기가 싫었다.
그리고 오늘은 손님이 역대급으로 몰아 닥쳤다. 처음으로 밖에 줄 까지 설 정도였다. 사장님 말로는 예전엔 원래 이랬다는데, 코로나 이후로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근데 그 바쁜 와중에 내가 당황하지 않고 큰 실수 없이 제법 잘 해냈다. 얼마 전에 사소한 실수가 누적돼서 혼났던 터라 그에 반해서 좀 뿌듯했다.
12.06.금 [워홀+129]_바빴지만, 그럭저럭 해냈습니다
화창하구만. 오늘은 오전 근무부터 저녘 근무까지 풀로 있는데, 브레이크 때 촬영까지 가야 하는 정말 꽉꽉 찬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걸 피로 회복도 안 된 몸으로 해야 하는 나. 그런 상황에서 사장님 친구 분이 커피를 사 오셨다. 라떼로. 정말 센스 넘치는 분이셔.
친구분도 오셨는데 일 마무리가 안 돼서 출발이 살짝 늦었다. 오늘 촬영은 서남쪽 끝이라 거리가 꽤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잘 못 알려준 덕에 길을 헤맸지만 그래도 또 당황하지 않고 잘 찾아갔다. 복잡한 지하철도 잘 꿰고 돌아다니는, 이제 제법 4개월 차 런더너라구요.
런던 지하철은 'Tube'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릴 정도로, 정말 작고 오래 됐다. 우리나라 고종 시대부터 운영하던 역사와 전통의 교통 수단이라는데, 확실히 지하철보다는 정말 작은 관 같다. 늘 신규노선인 엘리자베스라인만 타다가 노던라인을 타고 이동하니 기분이 색달랐다. 좌석시트도 너무 축축한 것 같고, 작고 비좁고, 약간 냄새도 나고.
그래도 난다 긴다 하는 부촌은 다 기존 노선에 모여있다. 부자 동네일수록 옛날 노선이니까 오래된 튜브를 이용한다. 아니다 그 사람들은 자가용 끌고 다니려나?
퇴근 시간 대 교통체증 이슈로 저녘 근무 시간이 한 참 지나 서야 일터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사장님이 수고했다며 저녘을 챙겨주셨는데, 일하다 먹어서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또 저녘 근무를 잘 해내고, 근처라는 세르지오를 만나러 갔다. 혹시 막차가 끊길 때까지 놀까봐 걱정했는데, 그 전에 가게 문이 닫아서 쫓겨났다. 깔깔. 영국 펍이란 정말 칼 같구만. 새벽까지 놀고 싶으면 어디로 가야하나.
캐나다에서 휴가를 마치고 온 세르지오는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다며 무슨 동물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밤이 늦었으니 자꾸만 나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를 좋은 친구로만 생각하던 내게 이런 행동들이 점점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눈치도 없이 점점 선을 넘기 시작했고, 내 인내심은 한계치에 달한 고무줄처럼 탄성을 잃고 말았다.
결국 이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앞으로 그만 보자고 전화를 했다. 세르지오는 친구끼리 왜 그러냐며 서운함과 황당함을 토로했지만 그건 순전히 그의 입장이었다. 솔직히 본인도 찔리니까 혹시 자기 때문에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계속 물어본 거였잖아?
물론 속상한 건 나다. 난 그냥 같이 어울리고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이 필요했다. 잔 정이 많은 내게-그 것도 연달아서- 잘 지내던 이들과 한 순간에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 한 켠으로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도 했었는 걸.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잠깐의 감정을 채우기 위해 관계를 맺는 사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은 걸 아는 나이니까.
최근에 파딘은 무서울 정도로 냉랭하게 날 대했고, 그건 꽤나 불편함을 자아냈다. 이웃끼리 앞으론 인사도 안 하고 지낼거냐는 말에 이게 내가 선택한 옵션이라고 받아치는 그. 그래 알겠다.
창 문 옆에 활짝 만개한 꽃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볼 때마다 돌변한 파딘이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다. 결국 또 나 혼자 남겨졌구나. 같은 마음이 아니란 이유 만으로 이렇게 부서지는 관계를 보며, 허무함을 느꼈다. 더 고독하네. 웃긴 건 여기에 반응할 에너지도 없다는 거다. 나 이제 누구랑 놀지? 껄껄.
12.07.토 [워홀+130]_계속 바빠요-
밤 새 잠을 설쳤다. 술 기운 탓인지 숙면을 취하기 힘들었는데, 불을 끄면 쥐들이 당장이라도 덮칠 것처럼 벽을 두드려서 더 잠 들기 힘들었다. 침대 밑을 확인 하는데 검은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으면서 두려움에 몸이 얼어 붙을 것 같았다. 방을 뛰쳐나와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 겨우 잘 수 가 있었다.
가끔 주말에 뭐하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집에 있었다고 한다. 사실 주말에 할 일이 너무 많다. 집도 치워야 하고, 영상 편집도 해야하고, 블로그도 써야하고. 오늘은 가계부랑 월급 정산까지 해야돼서 더 바쁜데. 너무 먹을 게 없어서 장을 보러 갔다. 진짜 귀찮았는데, 바람까지 너무 많이 불었다. 이러다 창문이 깨지는 거 아닌가 무서울 정도로.
근데 거기다 쥐까지 돌아다녀서. 진이 빠졌다. 정말이지 이 집에서 사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하다 하다 아침엔 도난 사건까지 있었다. 새벽까지 문 앞에 있던 슬리퍼가 사라졌다. 그룹챗에 혹시 내 슬리퍼 가져간 사람 있냐고 장난 치는 거면 돌려달라고 얘기하자마자, 방 문 앞으로 뭔가 집어던져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치 택배처럼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깔깔. 좋아해야하나 이거. 신으면서도 대체 어떻게 쓰이다 온 건지 알 수 없어서 엄청 찝찝했다. 몇 번을 그냥 버릴까 고민했는데 그냥 씻어서 신기로 했다.
점심을 먹는 데 주방에서 쇼분이랑 파힐을 마주쳤다. 쇼분은 방글라데시에선 돈을 많이 벌 수 없다며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투덜댔다. 대체 얼마나 못 벌길래 그러냐고 말하다가 파운드 별 환율을 보게 됐다. 우리나라의 파운드 대비 원화 환율은 방글라데시 화폐의 거의 6배 정도 높았다.
쇼분은 싸우스코리아는 여권 파워도 좋다며 영국보다 쎄다고 알려줬다. 한국인인 나도 모르는 사실을 어떻게 아냐고 묻자, 방글라데시같은 제 3세계는 계속 다른 나라들에 대해 공부해야 한 단다. 맨날 여자만 찾을 줄 알던 쇼분이 저런 얘기를 할 때마다 조금 현실적인 사람 같아 놀라웠다.
나도 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걸까? 최근에 나는 대부분의 일에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게 됐다. 많이 슬프지도 많이 화가 나지도 않고 그냥 그렇구나라며 넘기게 된다. 올라오는 감정들은 모두 삼킨 채. 누군가는 그걸 안정됬다고 말할 수 도 있을 거다. 실제로도 덜 피곤하고.
그래도 과거의 나는 대체로 모든 것에 진심이었다. 그만큼 사사건건 순수하게 감정적 에너지가 넘쳐 흘렀고, 어떻게 보면 그건 감수성이 풍부한 나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그냥 대부분의 일에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됐다. 일일이 대응할 에너지가 없는 건지, 내적으로 성숙하고 단단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내 자신을 잃은 기분이 든다.
사는 게 피곤해서 그런가. 계약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새 집을 찾아야 할지 한국 갈 비행기를 찾아야 하는 지 여러 생각이 든다. 그냥 오늘 밤엔 쥐 걱정 없이 푹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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