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5.월 [워홀+118]_ 익숙치 않은 경험을 한다는 건
안녕하세요. 새로운 세계를 경험 중인 사람입니다. 살면서 자주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들이라 한 편으로는 조금 혼란스럽군요.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일들은 전혀 상상도 못했습죠.
그러니까 아침은 오전 근무를 끝내고 막스 앤스펜서에서 장 보고 집으로 갔다. 술도 과자도 하나도 안 사고, 진짜 고민고민해서 골랐는데 부쩍 20파운드가 넘어버리는 M&S물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BANK station을 지나면서 예쁜 크리스마스 장식도 봤다. 근데 확실히 인스타에서 보는 게 이쁘구만.
집에 와서는 장 본 걸로 저녁 만들기. 오랜만에 아주 건강하게 차려 먹었다. 뭐 팬케이크가 건강식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생크림 아니고 그릭요거트니까. 건강식이라고 말하련다 껄껄.
밥 먹고 나서는 쉬려고 했는데, 세르지오가 근처에 교육 받으러 왔다고 잠깐 보자고 했다. 지난 번부터 보자고 한 거 계속 거절하기도 그래서 운동 삼아 나갔다. 근데 근처인 줄 알았던 약속장소는 근처가 아니었다. 20분 정도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40분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그리고 약 30분을 헤매게 되었다. 한강 다리만큼 복잡한 런던 다리들... 바로 옆을 두고 세르지오와 나는 계속 서로 엇갈렸다.
몇 번의 헤맴 끝에 발견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이 통로를 못 찾아서 어찌나 헤맸는지. 구글맵 반성 좀 하세요. 근데 네이버가 했어도 뭐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아래로 내려가니 보이는 멋진 가게들. 런던 브리지와 버로우마켓 근처의 야경은 가슴이 선덕거릴만큼 화려하고 멋졌다.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요즘 일몰이 빨라지면서 거의 밖을 돌아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나오면서 엄청 투덜대고 나왔고, 길 헤매면서도 집에 다시 돌아갈까 몇 번 생각했는데. 세르지오덕에 이런 런던을 또 보는구나.
오늘부터 절주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사이다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하 진짜 왜 이리 맛있는 겨 사이다는. 진짜 이러다 알콜릭이 될 까 무섭구만.
두 잔의 파인트를 마시고 나서는 약간 들떴다. 자신감이 붙어서 영어도 더 잘 나오고 그렇게 술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화의 흐름이 평소와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외국애들은 정말 깔끔한 관계만 지향하는 줄 알았고, 그래서 더 어쩔 줄 몰랐다.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 사람 앞에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또 다른 사건과 마주쳤다. 제법 심술이 나있는 그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긴 했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이제 제법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크지 않기 때문에. 그러자 못한 말이 있다며 당돌하게 들어온 그의 말은 제법 새파란 젊음이 가득했다.
하튼 한국에서는, 아니 살면서는 많이 겪어보지 못한 경험들이었다. 그런 일을 하루 만에 연달아 겪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정말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해보는구나. 진짜 여기서는 많은 걸 배우고 느끼는구나.
11.26.화 [워홀+119]_ 넘치는 애정과 비례하는 고독의 아이러니
아침은 미룽씨랑 통화하고 점심은 수영이랑 통화를 했다. 별 거 아닌데 꼭 욕을 하고 싶어서 고양이 밥 줘야 한다는 수영이를 닥달 했다. 내 잘못인지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는데, 수영이랑 통화를 하고 나니 또 별 거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예전엔 막연히 누군가 나에게 호감을 표현한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개 호감을 표현 받는 대상은 늘 내가 아닌 주변 사람들이었기에-나는 그들과 나를 비교했고- 그런 일에서 소외된 내 자신을 미워한 적도 있다. 그리고 그건 정말이지 경험이 많지 않은 자의 짧은 생각이었다.
상대방과 같은 선상에 있지 못한 감정들은 그 자체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해도, 불편함을 자아낸다. 나 역시 자주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난감했고.
웃긴 건 이런 일들이 있고 나니 더 외롭다고 느껴진다는 거다. 마치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아이러니처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본인에 대한 타인의 감정을 의심하고, 피상적이라 여기며, 관계가 깊어졌다가 상처 받고 싶지 않다며 회피하기도 한다.
상대에 대한 신뢰나 새로 시작할 용기가 없는 모습을 통해 그동안 내가 왜 이렇게 관계에 있어서 발전이 없는 지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미룽씨나 주봉이처럼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거나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 모든 우울함과 무기력함은 호르몬 탓이라고 우겨보고 싶었다. 사장님의 메시지에 보고서를 작성할 의욕이 감퇴 됐고, 아직도 남을 도우려는 엄마의 여유에 조금 피로감이 쌓인 탓일까. 쉬는 날이면 항상 이것 저것 해야 한다는 압박감만 가득하지만, 결국 욕심처럼 다 해내지는 못하는 그런 하루를 또 보낸 것 같다.
그리고 사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찾아가 따져 묻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럴 기운이 없었다. 이젠 제법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뭐가 또 남아있어서 이런 서운함 따위를 느끼는 걸까. 물론 충분히 의심 받을 만한 상황이긴 했지만.
아무튼 요즘, 나는 나를 놓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이런 저런 일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을 만큼 감정의 소용돌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어쩌면 그건 굉장히 안정적으로 보일 수 도 있지만, 동시에 그렇게 애정을 쏟아낼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저가 있을만큼 다채로운 감정의 나는 사라진 걸까.
이제 내일이면 런던에 온 지 120일, 약 4개월 차가 된다. 이제 제법 집세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 되고, 관련 분야에서 조그만 경력도 쌓고 있고, 눈물이 펑펑 날만큼 힘들거나 외롭지도 않다. 그렇지만 종종 물에 젖어가는 휴지처럼 어쩔 수 없는 쓸쓸함과 고독감이 스며든다. 그럴 때면 바닥에 매가리 없이 꽂히는 젖은 휴지 마냥 축 늘어지게 된다. 그래서 약간은 잃어버린 내 자신이 조금은 그리워진다. 감당하기는 조금 벅찼던 그 생동감이.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년 12월 첫 번째 일기 (12.01~12.02)_ 아둥바둥 여러 일을 경험하는 중 (4) | 2024.12.04 |
---|---|
24년 11월 마지막 일기 (11.27~11.30)_ 벌써 이렇게 (2) | 2024.12.01 |
24년 11월 얼 여섯번째 일기 (11.24)_ 달콤하지만 위험하지 (4) | 2024.11.26 |
24년 11월 열 다섯번 째 일기 (11.21~11.23)_가을과 겨울의 일상에서 (6) | 2024.11.24 |
24년 11월 열 네 번째 일기 (11.19~11.20)_편리와 편안의 사이에서 (5) | 2024.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