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9.일 [워홀+173]_ 일기 다시쓰기
하루 종일 일기만 썼다. 밀린 일기라 양도 많았는데, 반나절 동안 쓴 일기가 서버 문제로 증발해버렸다. 나름 인내심을 갖고 한 자 한 자 옮겨 쓰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복붙 해버렸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더니 몸이 좀 찌뿌둥했다. 요즘 너무 살이 찐 것 같아 산책 겸 라피네 갔다. 말도 없이 불쑥 찾아간 거라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엄청 좋아해서 좀 뿌듯했다. 시험 기간이라서 적당히 인사만 하고 오려고 했는데, 금방 간다니까 아쉬워해서 영화도 보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집으로 오기 전에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그걸 통해 그 또한 이 관계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제법 성질을 부릴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내 설명을 들어주려는 모습이 좋았다. 이 관계에 너무 나만 에너지를 쏟는 기분이었는데, 너도 많이 노력하고 있구나. 영어가 서툴러 답답한 내 입장만 생각했는데, 그 서투른 표현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쉽지 않았겠구나.
01.20.월 [워홀+174]_반 백수 라이프
이번 주도 일이 없다. 껄껄. 이 정도면 거의 백수인데, 뭐 런던에서 백수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 이런 고비가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여유가 생긴 김에 미루던 것들을 해보는 중이다. 장도 보고, 선반 정리도 하고, 까매서 보기 흉해진 뿌리 염색도 다시 하고.
너무 오랜 만에 염색하려니, 지난 번 터득한 노하우가 기억이 안났다. 여전히 뿌리는 검지만 그래도 뭐 이 정도면 만족. 제법 나쁘지 않게 나왔다.
저녁은 오븐구이를 해 먹었다. 이젠 오븐도 꽤나 잘 쓴다우. 밀린 빨래도 하고 집 좀 치우다 보니 벌써 하루가 다 가버렸네. 반백수의 삶도 바쁘다 바빠.
01.21.화 [워홀+175]_알차게 보낸 하루
호르몬때문인지 또 잠을 설쳤다. 한 시에 잤는데 새벽 네 시에 일어난 게 말이 되냐고. 불면증인건지 부지런한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침상은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먹었습니다.
집에만 있으니 자꾸 늘어지는 것 같아서 밖에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전에 살던 동네에 가서 라피도 보고, 도서관에서 공부 좀 하려고 버스를 탔는데- 이게 왠 일일까.
버스를 잘 못 탔다. 이상한 데로 온 거 까진 괜찮은데, 어쩌다 그 안에 조금 갇혀있었다. 종점에 도착한 지 모르고 계속 폰만 하고 있었던 탓이지 뭐. 나 못보고 문 잠궜다 돌아오신 기사님, 어떻게 여기 들어왔냐고 놀라시던 모습- 너무 웃기네. 껄껄. 아니 어떻게 뒤에 있는 지 모르고 갇혀버린 제가 더 놀라야하거든요? 무섭진 않았는데 그냥 계속 안에 갇혀있어서 시간 낭비하는게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도 목적지랑 많이 동 떨어지진 않아서, 다른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대신 그 길에서 참 예쁜 순간을 마주쳤다. 짙은 푸른색의 하늘에는 약간의 주황빛 온기와 함께 해가 떠 오르고 있었다. 수 많은 유리 건물들에 반사된 햇빛은 그 풍경에 생기을 더 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자들만 맛 볼 수 있는 이 달콤한 하늘.
달콤한 새벽 아침 하늘을 경험하고, 다시 그늘진 그의 집으로 방문. 불쑥 나타나는 깜짝 서프라이즈를 시도했으나, 얼리버드 라쉬가 전화를 안 받는 바람에 실패했다. 왜 하필 딱 그때 샤워를 한 거냐구요. 타이밍 정말 안 맞는 구만. 하지만 오늘 온 건 정말 때를 잘 맞춘 것 같다. 아침부터 신난 그. 배달문제로 여러 번 지연된 택배를 받아서 언박싱하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아보일 수 가 없었다. 나랑 같이 택배 뜯고 싶었다며 해맑게 웃는 녀석. 그래 나 참 잘 왔네.
생각보다 그는 럭셔리라이프를 쫓는 사람이었다. 몇 만원인 줄 알았던 물건들은 최소 몇 십부터 시작했고, 이제서 제법 사람사는 집 같다며 좋아하는 그. 내 기준에선 이해하기 힘들지만 사람마다 돈 쓰는 분야가 다른거니까 뭐. 그나저나 이렇게 살던 사람이라면, 지금의 생활이 꽤나 힘들겠다 싶네.
점심은 비리아니를 먹었다. 중동사람들은 정말 밥을 많이 먹는 것 같다. 이게 2인분이라니... 못해도 내 일주일 치 끼니는 되겠구만... 다 먹어야된다고 엄포를 놓던 녀석도 결국 좀 더 먹다 항복. 그렇게 먹었는데도 포장을 두 번이나 해야했구요.
식사 후에는 라피네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캠퍼스 투어도 하고, 껄껄. 십 년만에 대학생된 기분 나쁘지 않구만. 이런게 연하남을 가진 특권이려나. 라피친구들 앞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 장난도 쳤다. 그런 몰카에 대단히 재능이 없던 나.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던지.
라피는 우리가 장기적인 관계가 되려면, 함께 있어도 할 일을 하는 습관을 들여야한다고 했다.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도 좋지만, 때로는 같이 있으면서 각자 할 일을 할 줄도 알아야한다며. 그래서 그 훈련의 일환으로 나는 미루던 포스팅을 하고, 그는 시험공부를 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미루던 포스팅을 마칠 수 있었다. 마감기한이 있던 일이라 가능했던건지 모르지만. 어쨋든 오늘은 정말 여러 경험들로 또 풍족하고 하루를 보냈네.
01.22.수 [워홀+176]_ 간만의 일상들
근 한 달만에 촬영이 진행되었다. 라이언의 소개로 크리스를 인터뷰하게 되었는데, 굉장히 준비를 철저하게 해줘서 고마웠다. 이렇게나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줄 몰랐네. 외국인이 좋아하는 한국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떤 걸까. 조금은 신기하고 흥미롭게 느껴지는구만.
끝나고는 코벤트가든에서 휴식을 취했다. 주변 상점도 둘러보고, 아까 산 비스킷이랑 휘타드에서 나눠주는 시음티를 같이 마셨다. 점심 잘 먹었습니다~ 후후 카페가 필요없구만.
티타임을 즐긴 후에는 키코에서 메니큐어까지 야무지게 발랐다. 여러 색도 발라보고 네일샵 부럽지 않네. 일터로 돌아와서는 동료분이 주신 간식으로 배도 채웠다. 껄껄 이렇게 런던 사는 워홀러는 돈이 없어도 나름 재밌게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간만의 촬영과 간만의 나들이로 오랫만에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 드는구만.
01.23.목 [워홀+177]_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침에는 심지 어머님께 꽃을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연분홍빛 꽃들과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핑크색 장미들이 섞인 꽃바구니. 동백꽃처럼 크고 화려한 애들을 많이 좋아하셨는데, 진즉에 많이 사드릴 걸. 활짝 핀 꽃처럼 우리들도 싱그럽게 피어나길.
브레이크때는 정말 바빴다. 어제부터 이어진 풀근무에 점심 내내 손님이 끊이지 않아서 피곤한 상태였는데, 헤야할 게 너무 많았다. 그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사장님이 주문해주신 버블티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조금 지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 가서 멤버십 등록과 도서대여를 했다. 이제 당당하게 대출가능한 동네주민이라고.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라피가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시험이 끝나고 잠깐 브레이크타임에 들른 그. 맥주 마시러 갈거냐니까 이번 달 생활비 다 떨어져서 돈 없다는 녀석을 보며 '할말하않'이란 말이 떠올랐다.
웃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쌀쌀한 날씨에 거리를 해매면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카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한국이었다면 달랐겠지만, 비루한 이 곳 생활에 꽤 적응한 탓이려나.
비가 갠 하늘은 유독 더 예뻤다. 라피가 하늘을 가리키며 흐린 뒤에는 더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꽤나 로맨틱한 말이네. 우리는 이 흐린 날들을 잘 극복하고 피어날 수 있을까. 비가 와도 함께라면 두렵지 않고, 같이 있어서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게 인연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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