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3.금 [워홀+591]_ 눈물은 나고 포폴은 써야하고
다들 헤어질 걸 알았는데, 나만 몰랐나 보다. 이별 얘기에 어떤 선택이든 응원한다는 친구, 같이 울어주는 친구, 최근 들은 얘기 중 가장 행복하고 잘 한 소식이라는 친구, 내게 큰 상처를 줬음에 역정을 내는 친구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위로와 지지가 있어 그나마 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함께 걸었던 창문 위 조명부터 방문을 열 때 마다 보이는 커플 열쇠 고리, 옷장 위 수건까지 집안 곳곳이 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나의 깊은 공간까지 공유하던 사이가 이제 남이 되어버렸구나. 괜히 가슴도 답답해서 밖으로 나갔다. 멀리 가기엔 지쳐서 근처 카페로 갔다. 그냥 담담했다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다시 가라앉았다가 온갖 감정들이 펑펑 터졌다

해야 할 일은 미뤄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어쩌면 꼭 해야 할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미뤄버렸을까. 어쩌면 진실을 마주 볼 용기를 가지라며 그를 꾸짖었던 말은 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오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문자로 안부를 건넸다. 그 연락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다 들었다. 말로만 번지르르한 그의 무책임한 사랑에 화가 나다, 혼자만 울부짖는 기분이 들어 황량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나를 다시 찾아와서 잘못을 뉘우치는 상상을 하면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한없는 아픔을 끝내고 싶기도 했다. 어쩌다 이렇게 까지 우리 관계가 이렇게 변한 건지, 그가 나를 사랑했던 게 정말 맞긴 한 건지, 내가 1년 반이 넘게 했던 건 대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봤다.
처음엔 괜찮았다. 나는 워낙 남을 잘 배려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소중한 사람을 위한 거라면 더 잘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 사랑이라면 그도 변화할 거라고 믿었다. 그도 나도 서로를 사랑했다. 비록 그의 사랑이 상대적으로 미 성숙한 형태였지만. 책임과 신뢰가 필요한 관계의 무게를 그는 버거워했고, 그런 그를 대신해서 나는 두 사람의 몫을 해내야 했다. 점점 나는 그의 '여자친구' 보다 '보호자'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우리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장난 자동차를 혼자 밀며 곧 목적지에 도착할 거라고 믿었다. 그 밑에서 내 자신이 점점 망가지고 닳아가는 줄 모른 채. 힘든 런던 생활에서 서로 믿고 의지했던 사이였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함께 인생의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점점 잘못 돼 가는 걸 알면서도 놓을 수 없었다.
03.14.토 [워홀+592]_ 슬퍼도 일은 해야 하고
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밝은 척을 했다. 억지로 괜찮은 척을 했더니, 또 괜찮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쉬는 시간에는 정말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아 휴게실 쇼파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있는데, 오랜만에 돌아온 사쿠라가 반가운 티를 내며 옆에 앉았다. 무뚝뚝하던 애가 보고 싶었다며 계속 말을 건네는 데, 나도 반갑게 반응 해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까 너무 억텐으로 달렸더니 일일이 반응할 기운이 전혀 나지 않았다. 혹시나 괜한 오해를 할 까 싶어 그냥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거라고 말했다. 말은 담담하게 했는데, 이별이란 단어를 말하자마자 눈물이 단비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사쿠라가 급하게 티슈를 손에 쥐어줬는데 그 휴지 한 장에 걱정해주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 너무 고마웠다.
자꾸 감정이 벅차 올라 화장실에 가서 대충 눈물을 그치고 나왔다. 그렇게 그쳤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바빠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계속 라피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났다. 진심 어린 사과나 제대로 된 소통을 피하는 그의 비겁함과 한심함이 개탄스럽다가도, 또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물 밀듯이 몰려와서 마음이 아려왔다.
퇴근 길에 종종 그가 마중 오던 길목을 지나가는데, 왠지 그가 나타날 것 만 같았다.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는데, 어제 이후로 아무 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점점 이별이 더 실감이 났다. 또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03.15.일 [워홀+593]_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데
잠을 뒤척이다가 일어났는데, 생각보다 기분이 괜찮았다, 그 기세를 몰아 수영이에게 멀쩡하다고 전화를 했는데 또 눈물이 터졌다.
짐 문제 때문에 저녘에 차단을 풀었다. 풀자마자 라피가 문자로 연락을 했고. 그 길로 달려왔다.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2-300%의 변화라 여길 정도로 큰 의미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생각보다 내 결심은 확고했다. 늦은 시간에 둘 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날 것의 말들이 오고 갔다. 그 과정에서 그가 이 관계를 잃지 않고자 절박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더 와 닿았지만, 노력 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도 깨달았다.
03.16.월 [워홀+594]_ 좁힐 수 없는 간극
여전히 우리는 달랐다. 관계를 대하는 태도도 현재 이 상황을 인지하는 관점도. 그는 지금 상황을 'small break'라고 표현하며, 우리 관계의 영원을 확신했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이 우리가 성숙한 이별을 하기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했다.

어젯밤 그가 보여준 절박함으로,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 헤어짐을 결정한 게 잘한 일 이었다는 생각도 더 또렷해졌다. 서로를 위해 더 이상 미루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에게 다시 한 번 내 결정을 전달했다.
03.17.화 [워홀+595]_ 힘든 건 힘든 거니까
어젯밤은 한 시간마다 잠에서 깼다. 이제 그만 하자는 내면의 분노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불안과 조급함이 서로 각자의 목소리를 냈다. 버거운 마음에 성임이에게 연락을 했다가, 힘들어 보인다는 말에 또 무너졌다.

더 힘든 일을 겪는 남들도 많은데, 유난이라고 나를 나무랐다. 아무 일 없는 듯 해야 할 일을 하다가 갑자기 무너져서 엉엉 울기를 반복한다.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이게 뭐라고.
이런 상황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몇몇 친구들의 얘기가 들린다. 다들 현실을 느끼고 돌아가는데 혼자 괜히 아둥바둥 대는 것 같아 마음이 헛헛하다. 무엇을 위해 나는 여기 남으려고 애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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