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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주 수요일 오후 네시
한강 앞 네 번째 벤치.
그녀는
한 챕터씩 책을 읽어주었고,
그는 말없이 그것을 듣고 있었다.
일몰이 보일 때 쯤이면
서로에게 말없이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단순하지만 꽤 중요한
그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의식이었다.
ㅡ
2.
그녀는 책 속 주인공처럼
따뜻하고 상냥했다.
밝은 갈색에
약간 웨이브가 들어간 긴 생머리는
바람에 살짝 날릴 때마다
꽃내음이 나는 것 같았고,
어쩌다 환하게 웃는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면
그의 심장은
작렬하는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푸릇한 보리밭이
점점 싱그러운 노란빛으로
황금빛 물결을 이루듯이
그녀는
아주 서서히 그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ㅡ
3.
그때의 사고 이후,
그는 줄곧 깊은 바닷속으로
빠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숨쉬기조차 힘들고
너무 조용해서 무서울 정도인
나락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
곁에 있던 것들을
더 이상 잡을 수 없고,
아득히 사라져 가는 걸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
무력감을 학습해 가며
이제 앞으로는 영영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에게
어둡고 캄캄한 그의 삶에게
그녀는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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