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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

책 읽어주는 여자

by 킹쓔 2023.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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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주 수요일 오후 네시
한강 앞 네 번째 벤치.

그녀는
한 챕터씩 책을 읽어주었고,
그는 말없이 그것을 듣고 있었다.

일몰이 보일 때 쯤이면
서로에게 말없이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단순하지만 꽤 중요한
그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의식이었다.



2.

그녀는 책 속 주인공처럼
따뜻하고 상냥했다.

밝은 갈색에
약간 웨이브가 들어간 긴 생머리는
바람에 살짝 날릴 때마다
꽃내음이 나는 것 같았고,

어쩌다 환하게 웃는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면
그의 심장은
작렬하는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푸릇한 보리밭이
점점 싱그러운 노란빛으로
황금빛 물결을 이루듯이

그녀는
아주 서서히 그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3.

그때의 사고 이후,
그는 줄곧 깊은 바닷속으로
빠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숨쉬기조차 힘들고
너무 조용해서 무서울 정도인
나락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

곁에 있던 것들을
더 이상 잡을 수 없고,

아득히 사라져 가는 걸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
무력감을 학습해 가며
이제 앞으로는 영영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에게
어둡고 캄캄한 그의 삶에게
그녀는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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