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9.월 [워홀+20]_ 내 마음에도 꽃이 피었네
사실 이제 슬슬 런던에서 엥간히 유명한 데는 다 가봤고, 구태여 막 움직이고 싶었던 건 아닌데.너무 집에만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밖을 나섰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할 일 없는 백수처럼 보이긴 싫어서요.
전부터 미뤄왔던 서쪽 탐험을 떠나볼까나, 리젠트파크나 프림로즈힐은 너무 멀어서 계속 미뤘는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가보겠나 싶어서 그 쪽으로 걸어봤다. 두 시간 정도 걸린대서 걍 쉬엄쉬엄 가보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겨봤다.
한 시간 정도는 노래도 재밌고 풍경 보는 것도 재밌었다. 버스로 지나가던 길을 찬찬히 살펴보며 지리를 익히는 느낌도 좋았고. 근데 좀 지나니까 슬슬 지루해질 무렵, 킹스크로스를 만났다. 입국 후 첫 거처를 마련했던 곳이라, 내겐 고향처럼 느껴졌다. 저 세인트판크라스 호텔 시계탑은 언제봐도 반갑구만.
매번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해리포터 사진스팟. 그때는 매일 올 수 있는 곳이라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제 혹시 또 혹시모르니까 한 장 찍어봤다. 원래는 줄 서서 기다렸다 찍으려고 했는데,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한데서 그냥 한국인이 지나갈 때 부탁해서 멀찍이서 하나 찍었다.
온 김에 시리즈 2탄. 심지가 부탁했던 에코백을 샀는데, 맞는 봉투는 찾지 못했다. 하도 해매니까 우체국 사장님이 도와주려고 하셨는데 괜찮다며 손사레를 치고 나왔다. 하튼 영국인들은 참 따뜻하고 친절해.
가는 길에 캠든마켓이 있길래 살짝 들렀다. 런던은 이제 다 본 줄 알았는데, 여긴 또 느낌이 달랐다. 코벤트가든이 좀 더 세련되고 깔끔한 느낌이라면, 캠든마켓은 좀 더 힙한 느낌이랄까? 내부도 약간 인사동 쌈지길 건물스럽고.
뭘 좀 사먹을까하다가 그냥 리젠트 운하를 따라 걸었다. 조금 걷자 자유분방한 캠든마켓과는 다른 깔끔하고 세련된 건물들이 즐비했다. 사람들도 전형적인 백인 부유층처럼 보였다. 옷도 깔끔하고 헤어스타일도 정돈됬고. 전통과 현대가 살아숨쉬는 동네네.
런던 시내를 한 눈에 구경할 수 있다는 프림로즈힐. 일몰이 이쁘다는데 3시쯤 도착해서 그건 포기했다. 구글지도에 프림로즈힐을 치면 자꾸 두 개가 나와서 헷갈렸는데, 리젠트파크 옆 초록색이 있는 스팟으로 가면 된다.
이미 여기까지 두 시간을 걸어온 터라, 언덕까진 힘빠져서 못올라갔다. 옆에 리젠트파크에서 앉아있었는데 야외헬스장 같은 곳이었나보다. 온갖 몸 좋은 남자들이 다 와서 운동을 했다. 기구가 신기해보여서 몇 번 시도를 해봤으나, 이러다 병원신세를 질 것 같아서 몸을 사리기로 했다. 예- 아직 저 일 자리도 못구했거든요.
리젠트공원에서 브루노메이저의 리젠트파크 딱 들어주려고 했는데, 현실은 너무 춥고 집에 가고 싶었다. 많이 걸어서 피곤했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서 좀 추웠다. 반팔만 입고 나오려다 타기 싫어서 입은 바람막이가 감기는 안 걸리게 도와준 듯.
아 참, 스탠드도 샀다. 영국 내 한국인들끼리 중고 거래를 하는 곳에서 5파운드짜리 스탠드를 샀는데, 가져와보니 티백을 넣어주셨네. 감사해라. 역시 한국인의 정이 짱이다.
주방에서 아카리사네 엄마랑 마주쳤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을 잘 보내길 바란다니까, 나를 꼭 안아주시면서 꼭 좋은 일 자리랑 남자친구를 구하길 바란다고 했다. 그냥 하는 말일수도 있는데 난 왜 이런 게 너무 소중하고 애특하게 느껴질까. 마음에 꽃이 피는 기분이야.
나도 고마워서 편지를 썼다. 어제 받았던 환대를 잊지 못할것이며, 꼭 성공해서 근사한 답례를 하고 싶다고. 물론 문법은 다 틀린 채로... 고던이 고쳐달라니까 안 고쳐주네. 영국영어랑 미국영어랑 다르고, 하다보면 늘 거라고 너무 완벽하게 하지말란다. 참나-.
08.20.화 [워홀+21]_ 집에서 하루 종일 있기
아카리사네는 떠났다. 몇몇 식료품들은 플랫에 있는 사람들 먹으라고 두고 갔다. 참 따뜻하고 멋진 사람들이야. 평소엔 쌀과자 먹지도 않는데 괜히 땡기더라구. 주섬주섬 몇 개 챙겨서 내 찬장에 집어넣었다. 히히.
오랜만에 수영이랑 통화를 했다. 집도 보여주고 수영이 제주도 짐 싸는 것도 봐줬다. 제주도 가는 거 부럽다니까 런던에 있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란다. 사람은 다 자기가 없는 것만 눈에 들어오지.
수영이한테 마트 보여주려고 세인즈버리로 갔다.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불러세웠다. 역으로 가던 아카리사네 가족이었다. 알게 된 시간은 얼마 안되지만 왜 이렇게 깊은 마음이 물들어버린걸까, 괜히 조금 아쉬운 마음...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집으로 왔다.
기대하면서 산 납작복숭아는 그냥 자두랑 복숭아 같았다. 좀 더 익으면 맛이 달라지려나. 하튼 과일 처리 해야되서 대충 먹었다. 장을 괜히 봐왔나 싶을정도로 먹을 게 너무 많다.
사실 3주 째인데, 그 어떤 프렛에서도 연락이 안와서 조금 쫄린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 집 근처 스타벅스에 지원을 했다. 하- 진짜 카페잡 구하기 이렇게 어렵냐고. 집에서만 시간 보내는 거 진짜 따분하다. 백수되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당장 집세 내야되는데 이러다 돈 떨어질까봐 마음이 많이 불안하구나.
저녘 먹으려고 주방에 올라가보니 파힐이 밥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뭔가 신기한 걸 만들고 있는 그. 강황가루를 막 빻아서 뭘 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일이 떨어져서 엄마랑 뭐라뭐라 하는 것 같길래 내가 사다줄까 했더니 됬단다. 근데 또 꼭 필요한 상황인 것 같아서 테스코에서 사다줬다.
6파운드짜리 올리브유를 주자 그는 "아니 왜,,,?"라고 물었고 나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친구 좋은 게 뭐겠어~", "지난 번 밥 값~" 등 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어떤게 적절한 표현일지 감이 안섰다. 또 약혼녀 있는 남자 건드리긴 싫거든요.
그는 고맙다며 주먹을 갖다댔고, 나도 주먹인사를 했다. 약간 주짓수 스파링 전에 하는 인사 생각났다고 하면 진짜 못말리는걸까? 하튼 주짓수 너무 하고싶다. 심심해서 근처 짐 무료체험을 신청했다. 헬스장에서 바로 음성 메시지가 날아들었는데, 토익시험 보는 줄 알았네.
요즘은 인어공주가 된 느낌이다. 입은 있지만 말은 못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사실 하려면 할 수 는 있는데 계속 못알아들으니까 굳이 말을 할까 싶기도 하고. 아까 필립이 편지 고맙다고 뭐라뭐라 했는데 예스-땡큐 밖에 못해서 아쉬웠다.
가끔은 여기의 문명을 배워간다는 점에서 모노노케 히메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뭐- 조금 아쉽다 정도지 엄청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니다. 새로운 세계를 배워간다는 점에서 둘다 비슷하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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