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2.월 [워홀+13]_ 한국인에게 밥심이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밥을 사러 나갔다. 아마존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여기 택배시스템에 대한 강한 불신이 생겼다. 그래 내가 직접간다. 걸어서는 한 시간거리라길래, 산책삼아 걸어갔다. 백수 좋다는게 뭐겠어요? 교통비도 아낄겸 여유 좀 부려봤습니다.
가는 길에 런던교도 지나가고, 사드도 보고. 어렸을 때부터 듣던 런던브리지가 바로 여기구나. 그러고 보면 영국은 정말 문화 강국이야. 지구 저 편의 나라에서도 여기 노래를 알만큼 곳곳에 스며들어있네.
인스타에 스토리 올렸더니 사람들이 사드보고 잠실타워냐고 물었다. 은진이도 서울 다시 온 줄 알았다며. 그렇게 생각은 못해봤는데, 보니까 좀 닮은 것 같긴 하네.
시내 나온 김에 이탈리아 식료품에 가서 구경도 좀 하고, 후추도 샀다. 스트라치아텔라 너무 먹고 싶었는데 여름이라 갖고 다니기도 애매해서 포기. 다음에 꼭 사러올게요.
버로우마켓은 주말에만 여는 건지 거의 다 문을 닫았더라. 5년 전에 여기 처음 왔었는데, 지금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걷고 또 걸어 워털루의 오세요에 도착. 생각보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2주만에 만나는 첫 한국이라 너무 반가웠다. 눈돌아가서 이것 저것 구매했는데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물론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들이라 마감세일 들어간 거긴 하지만,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아마존보다 훨씬 더 저렴한데? 아직 2주밖에 안됬는데 한식이 여기선 왜 이렇게 땡기던지. 사람이나 음식이나 떠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구나.
한국인은 역시 밥심이다. 전엔 쳐다도 안봤을 레토르트 식품들 따위가 이젠 어찌나 애틋하고 귀하게 느껴지던지. 보통 반이면 그만 먹을 햇반도 한 공기 다 먹고, 김도 두 봉이나 깠다. 배가 든든하니 딴 생각이 안나더라. 그냥 좋았다.
그리고 젓가락이 생겼습니다 히히.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쓰는 나무 젓가락 말고 쇠젓가락을 구했다구! 그러게 집에 있는 금수저 안가져온 거 엄청 후회 중...
내 저녘시간이 7시 이전인데 비해, 얘네는 정말 먹고 싶을 때 먹었다. 밤 12시인데도 윗층 방글라데시 졸업생 커플들이 주방에서 부시럭댔다. 한국이었다면 남들 다 잘 때 부시럭 거린다고 주의주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여긴 정말이지 자유롭구만. 근데 지금 먹으면 언제 자니, 소화력이 좋은건지 늦게자도 일찍 일어날 수 있는건지. 정말 젊구나 너네는.
08.13.화 [워홀+14]_마법같은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나 만나러 가는 날. 영국에 휴가 차 왔다고 시간 맞으면 보자는 그녀의 연락이 조금 반가웠다. 약속시간이 갑자기 앞 당겨져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버스나 도보를 이용하다 전철을 이용하니 빨리 도착하고 편했다.게다가 새로 생긴 엘리자베스라인이라 KTX처럼 쾌적하고 좋았다. 흐흐 집 잘 골랐네 정말.
튜브는 두 세번 밖에 안타봤지만, 이젠 제법 플랫폼따라 잘 타고 내린다. 영국 티머니인 오이스터카드 대신 신용카드인 레볼루트로 요금을 결제하기도 하고. 조금 현지인 같잖아? 히히.
하지만 예나 앞에선 그냥 베이비였습니다. 영국에서 10년 정도 생활을 했던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자리를 잡고, 내 취향에 맞는 메뉴를 묻고 추천받았으며, 예의바르게 주문을 했다. 식사가 시작되면 식탁보를 무릎에 까는 기본적인 영국 식사예절부터 공손하게 계산을 요청하는 표현까지 알려줬다.
함께한 식사 또한 훌륭했다. 한식당에서도 못먹었던 김치가 올라간 플래터부터, 부드러운 립까지.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즐길 수 있을만큼 레몬 위스키 또한 상큼하고 맛있었다. 영국음식 진짜 맛 없냐고 묻는 사람들 많은데, 전통음식이 발달하지 않았을 뿐. 영국에서 먹는 음식이 다 맛이없진 않은 것 같다. 특히 런던은 먹을 데가 많습니다. 단지 약간 한국보담은 비싸게 느껴질 뿐!
밥 먹고 소화도 시킬겸 코벤트가든 들러서 쇼핑도 해주고, 인스타에서 보던 귀여운 구름이랑 인사도 하고. 여기가 골동품을 판매하는 곳이라고해서 인사동 느낌이냐는 내 질문에 예나는 그것보단 약간 성수느낌이라고 했다. 하긴 브릭레인보다는 살짝 더 세련되고 더 모던한 느낌이 나지.
영국에 왔으면 핌즈를 꼭 먹어야 한다는 그녀를 따라 펍으로 들어갔지만, 왠일인지 구하기 힘든 메뉴가 되었군요. 사이다라도 먹어보자는 제안에 다른 바로 자리를 옮겼다. 영국에서 유명하다는 All bar one. 여기서 유명한 코파버그 사이다를 경험시켜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게 없어서 다른 브랜드 걸로 먹었다. 그리고 결과는 대 성공! 도수도 4도로 높지않은데 달달하니 정말 맛있었다.
한국인이에게 밥 다음으로 필요한 건, 사진이죠. 여기와서 그렇게 돌아다녔어도 프사 한 장 못건졌는데 예나덕에 꽤나 화려한 사진들을 남길 수 있었다. 흐흐 역시 한국인이 좋구만.
그 다음코스는 영국에서 유명한 스콘카페. 파티셰리 너무 가보고 싶었는데 오늘 나 소원성취의 날인가? 그동안 쇼윈도로 안에있는 남들 부러워만 했는데, 이렇게 다 가보는구나.
클로티드크림도 코스트코에서 먹던 거랑은 다르네. 에클레어도 너무 맛있구. 플랫화이트도 영국 와서 첫 도전이엇는데 괜찮았다. 얼그레이에 저렇게 레몬이랑 타주는 줄 알았으면 나도 저거시켰을걸.
예나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본인과 달리, 여기서 남을 수 있어서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부러웠다. 다시 처음부터 이뤄내야 하는 내 처지와 달리, 안정적인 일 자리, 익숙하고 편한 집, 정서적인 지지기반이 있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음이. 무료한 일과에 지쳐 가슴 뛰는 일을 찾고싶다는 그녀에게서 수년 전 나의 모습이 비춰졌다.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는존재야.
일이 안 구해져서 걱정이라고 하자, 예나는 잡은 금방 구한다며 지금은 여유를 즐기라고 했다. 직장 다니게 되면 데이 오프잡고 하는 것도 눈치보일거라고, 놀 때 많이 돌아다니라며 조언했다. 한 달은 그냥 놀아도 된다는 그녀의 말에 조금은 조급했던 마음이 놓였다. 경험자가 해주는 조언이라 더 와닿았달까?
마지막 코스는 한인마트 털기. 근처에 오세요하고 서울플라자가 붙어있길래 거기 가서 이것 저것 샀다. 오세요는 어제 갔던 워털루점보다는 꽤 컸다. 서울플라자는 닭강정도 팔고 안에서 먹을 수도 있었다. 나는 비상식량을 비축하는 사람처럼 마감할인 제품을 주섬주섬 챙겨서 계산했다.
브라이튼으로 돌아가는 예나를 빅토리아역까지 바래다 주었다. 빅토리아역은 킹스크로스만큼이나 컸다. 유스턴이랑 비슷한듯 하면서 패딩턴이랑은 또 다른느낌이었다.
더 멋진 다음 번의 만남을 기약하며, 플랫폼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 애를 보내고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나는 다시 또 혼자 남겨졌구나. 이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다시 남을 곳은 여기구나. 그래도 제법 기운이 났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에 학신이 생겼다. 앞으로 왠지 잘 할수 있을거란 막연한 희망이 차올랐다.
사람은 자기 믿음에 따라 다른 우주를 갖는다.
유재석의 노래처럼 인생은 말하는대로, 믿는대로 된다고 한다. 그만큼 그 사람이 가진 사고방식이나 신념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나의 믿음은 연달은 워홀 탈락으로 조금씩 금이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제한 연령인 만 30세가 지나면서, 그 신념은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나의 우주는 무너지지 않았다. 작년 워홀 연령제한이 늘어나면서 영영 사라져버린 줄 만 알았던 기회를 찾았고, 마침내 바라던 바를 이뤘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두 지켜봤던 사람과 만났다. 열정으로 가득찼던 나의 반짝임을 기억해주고, 진심 어린 축하와 응원까지 받았다. 요 며칠 불안과 외로움으로 흔들리던 날들을 단단하게 어루만져주는 선물같은 하루였달까?
집으로 돌아와 그녀가 선물했던 꽃을 정리했다. 이 꽃들을 보니 미녀와 야수의 요술장미가 떠올랐다. 유리 속 장미꽃잎이 다 떨어지기 전까지 야수는 진정한 사랑을 만나야했다. 나는 여기서 2년 안에 진정한 내 삶을 찾을 수 있을까?
뭐- 못찾으면 어떠리. 헛짓거리했다고 느낄 수도 있고, 사람들이 말하던 성공과 먼 날들을 보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우주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던 이 시간들은 분명 또 다른 꽃을 피워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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