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8. 목 [워홀+9]_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구나
새벽부터 짐 다 싸고 체크 아웃 대기 중. 이젠 제법 이사계의 척척박사가 되었기 때문에 한 방에 움직일 수 있도록 완벽한 채비를 끝냈다.
일주일 동안 내 방 창문을 지켜주던 세인트판크라스 호텔. 아쉽지만 한동안 못보겠네 히히. 나는 이제 새집으로 가, 또 놀러올게 잘 있으렴. 한국어쓰면 목소리가 아주 귀여워지는 여기 스텝이랑도 인사하고 나왔다. 아쉬워- 나중에 또 오고 싶을만큼 너무 좋은 곳이야.
버스타고 집 가는데 사람들이 엄청 몰려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는데 그냥 점심시간에 사무실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었다. 런던에 인구밀도는 서울만큼이나 어마어마하구나.
플랫에 도착하자 인도여자애가 마중을 나왔다. 이름 물어봤는데 기억이 안 나네, 쏘리. 하튼 그 이름 모를 여자애는 정말이지 은인이었다. 약 50키로나 되는 내 짐 덩어리들을 함께 옮겨주었기 때문이다. 집에 도와줄 남자 없냐고 묻는 내게 그런 거 없어도 괜찮을거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함께 하면 어려울 게 없다며 나를 부끄럽게 만든 그녀. 더러운 캐리어 바퀴를 두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들면서 정성껏 도와주던 그 친구가 참 고마웠다.
사실 한국에서는 나도 어떤 일이든 빼지않고 잘 나섰지. 일 하는데 남녀가 어딨냐고 말하면서, 하지만 여기는 다치면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영국. 그래서 겁도 많아진건가.
오자마자 테스코에서 장을 봤다. 물티슈로 방 좀 닦으려고 했는데, 방이 작아서 생각보다 쓸 일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옷장이 없는 방을 선택했다는 거다. 결국 오늘도 나의 캐리어 속 짐들은 빛을 보지 못했다.
대신 이제 밥을 해 먹을 수 있다. 예! 당장 테스코로 가서 즉석식품 2개랑 물, 그리고 시금치를 조금 샀다. 이게 12파운드라니, 그동안 나 외식에 정말 돈을 많이 썼구나. 2L 물병 드는 거 싫다고 온라인에서 주문하던 내가 5리터짜리 물을 어깨에 이고 오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런던의 물가는 이렇게 인간을 변화시키는군요.
조리를 좀 하려고 했는데 가스불을 키는 방법을 몰라서 버벅댔다. 하는 수 없이 전자렌지에 넣으려니, 안타깝게도 이 라자냐는 전자렌지 조리 금지였네. 당황하던 찰 나 지나가는 플랫메이트에게 도움 요청해서 다행히 조리에 성공.
그런데 방을 그렇게 꼼꼼하게 본다고 봤는데도 하나 놓친 게 있었다. 옷장이 없다는 거. 게스트하우스에서 있으면서 책상에 대한 불편함만 있었기 때문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이라고 할까? 급하게 이케아에서 서랍장과 옷걸이를 주문했다. 가구랑 침대보를 사고 나니 약 20만원 정도를 지출했다. 꼭 필요한 것만 사려고 골라냈는데도, 그만큼의 지출은 어쩔 수 가없구나.
저녘은 아까 먹고 남은 볶음밥이랑 야채. 양념이 안된 맨밥을 먹고 싶은데, 그런 게 없네. 당장 씻을 세제들이 없어서 영국의 다이소 파운드랜드에서 샴푸도 사고. 원래는 부츠에서 사려고 했었는데 한 푼이라도 아껴야되니까.
집을 구하고 나니 정말 눈 앞에서 돈이 펑펑 사라지는게 보여서 조금 초조해졌다. 안되겠다 싶어서 사우스웨스트쪽 프렛에 알바자리라도 넣어봤다. 어떤 사람은 온 지 이틀 만에 여기서 일하게 될 정도로 수월했다는데, 과연 나한테도 해당되는 말일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집만 구하면 한숨 돌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밖에서 입던 옷은 절대 방으로 들이지 않았던 내가 신발과 같은 공간을 써야한다는 것도, 화장실을 쓸 때마다 오르락 내리락해야 하고, 선반없는 욕실에 밖으로 물이 튀면 답이 없는 건식 화장실까지. 또한 뭐가 묻었을지 모르는 더러운 것들을 침대 위에 두어야 하는 작금의 환경들에 살짝 현타가 왔다.
여기서 살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데, 공감한다. 아직 뭐 엄청난 사치를 누린 것도 아닌데. 밥만 먹고 꼭 필요한 것만 사는데도 잔고가 아슬아슬해져간다. 한국에서 누리던 여유롭고 등 따시던 생활이 벌써 그리워진다. 이 나이에 지금 이게 무슨 짓 일까?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게 과연 맞는걸까? 이 경험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괜히 돈 붓고 시간 잃는 헛짓거리가 아닌가.
문득 또 불안해졌다. 공간만 바뀌었지 항상 불평하고 불안해하는 건 여전하구나. 카페잡을 구하면 또 일 하는 거에 비해 돈은 많이 못 번다고 투덜대겠지. 직장을 잡아도 한국이랑 문화가 달라서 적응하는 데 또 걸릴테고. 나란 사람은 참- 왜 그러는걸까?
답답한 마음에 한국에서 가져온 향수를 뿌렸다. 코끝이 저릴 정도로 비누향이 가득해지는 비비앙 향수. 잠실 롯데월드몰에서 고던이랑 같이 샀던 이 향을 맡고 있자니 반갑고도 가득한 서울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집이 대로변 근처라 시끄러운데, 옆 방에 방음까지 안됬다. 생일파티를 하는 건지 환호에 차 대화를 하는 두 커플의 말들이 너무 또렷하게 들렸다. 어쩔 수 있나, 영어공부 한다치고 계속 들었지 뭐. 집 앞 도로에는 흑인힙합을 크게 틀고 다니는 차들이 많다. 노트북 속 영상의 소리가 묻힐만큼. 이런 환경에서도 잘 살고 있는 나. 좀 대단하게 생각해볼까?
생각해보면 난 완전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인 줄 알았다. 잠자리에 예민해서 이런 데선 못 살거라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또 그렇지도 않더라. 게다가 너무 피곤해서 잠이 계속 쏟아진다. 아무리 밖에서 난리 부르스를 떠도 잠이 잘 온다. 아직 시차 적응 중인걸까? 아니면 몸에 이상이 생긴건가 또 걱정이 되기도 하고.
08.09.금 [워홀+10]_ 그립고 그리운 한국
아침은 어제 테스코에서 사온 토마토랑 시금치, 그리고 브리 치즈. 점심도 이걸로 먹었다. 한국에 있을 때 보다 건강하게 먹네 정말. 아르고스에서 주문했던 베딩세트(침구세트)를 픽업하러 갔는데, 인도여자 점원이 물건을 카운터에 집어 던졌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땡큐가 튀어나왔다. 내가 여기서 쏘리앤땡큐 머신이거든. 이런 대접에 감사하단 말까지 자동반사된건 좀 분하지만 뭐 어쩌겠어. 참 못배웠구나 너는. 그러고 말아야지.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캐롤 터킹턴
힘이 들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일을 겪을 때 마다 이 말을 되새긴다. 이 또한 나의 훌륭햔 양분이 되리라고 위로하면서. 한국에서의 삶과 지금 런던에서의 생활을 비교한다면, 정말이지 천지 차이다. 큰 방에서 여유로운 수납공간을 갖고, 편안함을 즐기던 생활은 사라졌다. 여기선 남이 쓰던 식기를 써야하고, 신발을 방에 두고 밖에서 입던 옷을 침실에 올려두는 등 위생 관념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전에는 몰랐지만 나는 내 취향, 내 가치관 등을 또렷히 내 세울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니 그건 감사한 일이었다. 타지에서의 삶은 정말 많은 걸 내려놔야 한다.
인종이 다르단 이유만으로 한 번도 겪지 않은 수모를 겪거나, 매 번 나의 신분을 증명해야 하며,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곳에서 짜잘한 서러움을 겪어야 한다. 넉넉하게 누리지도 못했는데 돈은 부족하고. 그래도 노숙하지 않아야 하는 것에 만족해야하고. 그저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되는 그런 삶을 선택한거구나. 내가.
집으로 돌아와 이불보를 빨았다. 건조기도 되는 세탁기이길 기대했것만, 아쉽게도 그런 건 아니었다. 빨래가 다 되길 기다리는 동안 뷰잉 때 봤던 인도 안경남과 마주쳤다. 런드리 사용법을 물어보자 이것 저것 알려주던 그는, 답변이 끝나자 자기 차례라는 듯이 내게 이것 저것 물었다.
어디서 왔냐느니, 방세는 얼마내냐느니, 일 하러 왔냐느니. 뭐 그런 것들. 이젠 자신있게 무직외국인(an unemployed foreigner)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니는 중. 집세는 조심스러워서 비밀이라니까, 자기넨 두명이서 사는데 1,370파운드라고 넌 더 비싸게 줬을거라고 했다. 그래 더 비싸게 주긴했다 임마.
의자 줄까? 밥은 먹었니 등. 그는 제법 날 챙겨주려고 했다. 나는 수줍기도 하고 약간은 그가 의심스러워서 가볍게 "No thank you"라고 거절했다. 낯선 땅에서 누군가 베풀어주는 친절은 참 따뜻하고 달콤했지만, 그걸 받아낼 마음의 여유가 없는건가 싶기도 하고.
방으로 내려가 이불보를 씌웠다. 덜 말랐지만 종일 펼쳐놓기도 애매한 상황이라서 어쩔 수 가 없었다. 누가 썼는지도 모를 바닥에 까는 천은 부동산에서 빌릴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한 채로 사용 중이다. 그래도 침구를 정리하니 제법 그럴듯한 공간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나아졌다.
센트럴의 프랫에 지원했다. 이제 밥을 좀 먹어야겠다 싶었다. 어제 봐둔 근처 한식당에서 저녘을 먹자 싶었다. 하루 종일 토마토, 치즈, 시금치 외엔 먹은 게 없다보니 배도 고프고 몸도 힘들었다. 앨더게이트 근처라 굉장히 세련되고 멋져보이는 한식당은 앉자마자 얼음물을 내어줌으로써 나의 맘을 쏙 빼앗아 버렸다.
순두부를 한 입 넣자마자, 눈물이 차올랐다. 아 이게 바로 타향살이하는 사람들이 찾는 고향의 맛이구나. 일주일 만의 한식이 얼마나 반갑고 맛이 있던지 10분 만에 뚝배기 하나를 금새 비웠다. 따뜻한 식기처럼 몸에 열이 돌고 땀이 나면서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오이소박이도 추가할까 고민했는데, 왠지 공기밥 값도 따로 받는 걸 보니 꽤 돈이 나오겠다 싶어서 참았다.
밥을 먹는데 테일러스위프트 노래가 식당에서 흘러나왔다. 친구들과 세종시를 여행하며 은진이랑 릴스를 찍던 노래라 애들생각이 부쩍 났다. 벌써부터 이런 마음이 들면 어쩐담.
계산을 끝나고 화장실을 잠깐 들렀다 밖을 나가려는데, 점원이 황급하게 붙잡았다. 아까 한국인이냐고 묻던 점원이 서비스라고 맥주 한 병을 까서 들고 온 것이다. 참나- 자꾸 울리지마세요, 낯선 땅에서 느끼는 한국의 정. 여기 사장님이 인심 좋기로 유명하시다던데 점원들도 너무 친절하고 좋았다. 다음에 돈 벌면 삼겹살 구워먹으러 올게요. 고맙습니다.
매일 같이 주변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던 한국과 달리, 낯선 이 곳에서는 이런 작은 친절이 너무나 소중하다. 여기 저기 치이며 고단했던 마음 한 구석이 사르르 녹는 것 같은 이런 정. 이게 바로 한국인들의 끈끈한 정이지.
무알콜 맥주를 들고 굿맨스필드(Good man's field) 광장에 앉았다. 논알콜맥주를 보니 오대산도 생각나고, 내 다리 쭉 펴고 있으라던 성임이가 생각났다. 처음 보던 날부터 긴 여행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베풀던 그녀. 내게 호의롭던 사람들이 그립구나.
나온 김에 타워브릿지를 들렀다 가기로 했다. 클렌징젤이 안맞는지 계속 얼굴이 붉어지길래 선크림 안바르고 그냥나왔더니, 따가운 햇살에 얼굴이 익었다. 어차피 빨개지긴 마찬가지구만, 참나. 조금 걷다보니 저 멀리서 런던탑과 사드, 런던브릿지가 보였다. 윌아이엠 뮤비에서 보던 타워브릿지. 런던 오면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왔구만.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금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정말 많았다. 관광객도 많고- 그냥 동네사람들도 많고. 누가 서울만 도깨비시장처럼 복작인데? 런던은 더해요 더해.
타워브릿지 아래에서 사람들 구경을 좀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시간도 금방가고, 해가 있는 시간이 길어서 제법 늦게까지 떠돌다 오게 되는 것 같다. 밖에 나갔다하면 8-9시구만. 내일 이케아 상품 받아야 되니까 집에 꼭 있어야 된다. 세인즈버리 보이길래 또 먹을 거 줍줍해서 돌아가기.
집 가는 길에 만난 터키식당. 또 성언니 생각 모락모락 나고. 여기가 런던인지 인도나 중동인지 모를 정도로 많은 무슬림들을 만나다 보니, 제법 그들의 문화도 배울 기회가 많아진다. 일례로 오늘 아침에 인도 안경남이 먹던 피타브레드가 너무 맛있어보여서 샀다. 쌀 대신에 먹지 뭐.
엄마는 여행 다닌다고 생각하고 지내다 오라고 했다. 한국시간은 꼭두새벽일텐데 이렇게 연락이 온 거보면 걱정이 많은가보다.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에 젖은 딸을, 부모 입장에서는 보기가 조금 힘들었을수도 있고. 스티브도 런던생활은 헬일거라고 자꾸 다른 일 자리 알아봐준다고 하고. 남들은 다 연락온다는 프랫에 두 번째 이력서를 넣었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조금 마음이 급해진다.
아직 일 주일이 조금 지났는데, 벌써 한국이 그립고, 여기 생활에 종종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즐겁고 신나는 날 보다 가만히 있다 눈물을 툭툭 흘리는 날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오기 전엔 못 오면 죽을 것처럼 굴던 과거의 나야 어디갔니? 과연 나는 며칠을 잘 버틸 것인지, 그저 적응하는 과정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치만 아직 시작도 안했잖아. 일단 해보고 다시 결정하자. 겁내지말고, 주저 앉아서 징징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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