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0.토 [워홀+11]_ 혼신의 방 꾸미기
이젠 제법 괜찮아진 밥상. 어떤가요? 세인즈버리 닭가슴살 제법 맛있네. 걍 데워먹기만 하면 되니 너무 편하구만. 피타브레드도 맛있구. 영국 토마토는 맛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너-댓번 사먹었는데 모두 실패가 없었다. 한국돈으로 삼천원 정도로 가격도 싸고. 대체로 껍질이 얇고 부드러운데, 살짝 달큰한 맛이 난다니까.
드디어 받은 몬조. 생각보다 별 거 없구만 왜 이렇게 밀당했던거야. 아무튼 나도 이제 몬조피플이 되었다. 형광색이 눈뽕 끝내주는구만요.
이케아가 12시 18분과 1시 18분 사이에 온다고 했다. 혹시 그냥 가버릴까봐 내려가서 기다렸고 다행히 잘 받았다. 혹시 받을 사람 없으면 어떻게 되는거냐니까 그냥 가버린단다. 안되지 안돼. 내가 빠른배송이라서 돈도 4파운드 더 냈는데. 대문 열어서 배달 완료한 거 사진 찍어야 된다고 문 열어달래서 그 자리에서 열쇠로 열어줬다. 한국이나 여기나 택배인들 고생스럽구만.
그리고 기나긴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 두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가구 조립이 거의 다섯 시간은 걸린 것 같다. 행거는 30분도 안되서 다 만들었는데, 서랍장이 문제였다.
뭔가 자꾸 릴 위 아래가 바뀌고 좌우가 달라서 헷갈렸다. 계속 빠지고 해체되면서 큰 소리가 나고, 옆방 눈치 보이고. 잘못 끼기라도 한 건 다시 떼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게다가 드라이버도 없어서 손톱 줄을 돌려서 나사를 박아댔다. 손은 까지고 긁히고. 왜 조립비를 50파운드(약 10만원)씩 받는 건지 알겠더라.
그래도 수납공간이 생기니까 가방 걸 곳도 생기고, 제법 정리정돈을 할 수 있었다. 서랍장이 작아서 옷을 반 밖에 넣지 못했지만 아무렴 그게 어디야.
방 정리를 끝내고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밖에 부동산 관리인들이 부산스럽게 다녔다. 아침에 전기시설이 고장났다는 경보음이 울리더니, 그것 때문에 왔나보다. 온 김에 내 콘센트도 고쳐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알겠다고 한다. 집 앞 전기상점이 문을 안 열어서 다른 곳에서 구해오겠다고 좀 기다려달라고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길래 오늘은 안되나 보다 하고 방문을 닫고 있는데. 수리기사님이랑 관리인들이 왔다. 럭키비키!
들어가도 되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근데 신발 신고 들어오란 얘기는 안했거든요. 성언니한테 물어봤더니 말하면 들어줄거라고 네 방인데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고 했다. 조심스레 신발 벗고 들어올 수 있냐니까 다들 기분나빠하지 않고 주섬주섬 벗어줬다. 양말군단들은 그렇게 새 콘센트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처음 봤던 부동산 사장님도 만나고, 계약 도와줬던 부장님 느낌 나는 아저씨도 만나고, 오늘 처음 보는 키 큰 직원분도 만났다. 잘 차려 입은듯한 옷, 잘 교육 받은듯한 친절함, 유머를 잃지 않는 여유로움, 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단호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 내가 생각하던 잘 까불고, 실 없는 인도인 편견이 이렇게 깨집니다.
포스트잇 사고 싶어서 파운드랜드나 가려고 나왔는데, 어두운 분위기에 겁이 나서 들어왔다. 날이 어두우니 확실히 사람들이 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요즘 팔레스타인 관련 시위도 늘어나고 있고, 이민자들을 향해서 반감을 가진 단체들이 많아서 조심해야 했다.
확실히 밖에 안 나가니 돈 쓸일은 없구만. 그래도 내일은 쇼디치나 브릭레인 마켓 구경이라도 가봐야겠다. 곧 일 구하면 또 못 누릴거아냐,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구.
08.11.일 [워홀+12]_쌀밥이 먹고 싶어요
아마존 프라임 배달이 열시까지 온다는 줄 알고 느적느적 기다렸는데, 그 배달이 오후 열시였네. 안되겠다 싶어서 콧바람 쐬러 온 브릭레인 마켓.
일요일이 제일 핫하다고 해서 왔는데 정말 그랬다. 구제를 파는 곳으로 유명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동묘시장 정도 되려나? 옆에 영국의 홍대로 불리는 쇼디치도 있구. 여기가 뱅크시의 고향입니까?
영국은 참 서점이 많은 것 같다. 거기서 파는 에코백도 많고. 심지 생각나서 또 한번 들어갔다가 서점 구경 슥 하고 나와주고.
어딜가도 사람이 붐볐는데, 특히 제일 핫했던 곳은 브릭레인 베이글. 여기가 런던에서 제일 유명한 찐 런던베이글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도보 끝까지 줄이 서있었다. 이렇게 줄 서고 하는 거 한국만 그런거라며요,…?
여기는 장사가 너무 잘 되서 영국에서 보기드물게 24시간 운영을 한다. 이 곳 사장님도 매장키가 없다고 할 정도니 그 인기가 알만하다. 시그니처메뉴라는 쏠티드 비프 피클 샌드위치랑 플레인을 하나 사서 나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주문 실수할까봐 바짝 쫄았는데 다행히도 순조롭게 주문을 받았다.
근처에 공원 있길래 앉아서 밥을 먹었다. 옛날엔 샌드위치 사서 공원에 앉아먹는 외국인들을 낭만있게 봤는데, 그냥 다인인(Dine-in) 할 형편이 안되서 그런 거였다. 네- 제가 그렇단 말은 아니구요.
쏠티드란 말에 짤 까봐 걱정했는데, 런던베이글 뮤지엄에서 먹던 포테이토 그 뭐시기 메뉴보다 훨씬 담백했다. 고기도 이 정도 가격에 이 퀄리티라는게 믿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부드럽고 맛이 있었다. 그래도 제일 맛있는 건 천원도 안하는 베이글이었다. 나 왜 이거 한 개만 샀나...
화창한 일요일. 나온김에 쇼디치까지 가볼까 하다가, 구글 지도에 보이는 꽃시장에 가봤다. 한국에서도 여기 오기전에 계속 들르려고 했는데 못가서 아쉬웠거든.
영국은 확실히 원예산업이 잘 발달되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로 치면 5-6천원에 예쁜 꽃들을 한 다발씩 구입할 수 있다. 카드 천국인 여기서도 꽃 시장은 현금 선호하는 건 비슷하구나. 화려한 꽃들을 보고 나도 좀 사갈까하다가 말았다. 월급 받으면 나도 꼭 사러와야지.
일 자리를 구하면 뭘 또 하고 싶냐고? 고급 쵸콜렛을 먹어보고 싶다. 여기는 고급 파티쉐리가 참 많은데, 아직 그런 거까지 도전해 볼 여유는 없어서. 뮤지컬도 보고 싶다. 알라딘 요즘 한국에서 엄청 인기던데, 여기서 원작을 봐보고 싶다.
아주 평화롭게 잘 놀고 왔는데, 집에 오니 이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주문했던 햇반, 김, 간장 택배가 사라진 것이다. 집 근처 쓰레기통 옆에 택배를 던지고 간 기사님. 내가 도착한 건 1시 40분쯤인데, 거의 한 시간도 안되서 물건이 없어진 거다.
이 와중에 딱 저것만 없어진 게 조금 어이없기도 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플랫 곳곳을 돌아다니며 내 택배 못봤냐고 물었다. 그럴리가 없는데- 저걸 누가 가져가. 동시에 이게 악명높은 외국의 택배시스템이구나 싶기도 하고. 따뜻한 쌀밥을 기다리며 애원했던만큼, 실망도 크고 짜증도 났다.
아마존 고객센터는 연결도 안되고, 택배는 찾을 수 없었다. 근처에 CCTV도 없고, 하- 계속 10분 단위로 체크할걸. 이케아는 본인 아니면 안 준다고 해서 여긴 다 그렇게 흘러가는 줄 알았지. 긴장의 끈을 놓고 있던 내 자신에게 너무 화가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 아닌데, 먹다남은 베이글로 허기를 달래다 잠이 들었다.
일어나서 테스코로 장을 보러갔다. 당장 먹을게 하나도 없으니까, 뭐라도 집어 넣어야 또 살지. 야채랑 이것 저것을 사는데 한 흑인 여성이 점원가 시비가 붙었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결국은 두 보디가드에게 쫓겨났다. 무슨 상황일까- 도난의심을 받았나.
그러고보니 내 아마존 택배 도난 사건은 별 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졌다. 그래- 세계 최강 아마존 환불 시스템을 경험해보자. 여권 잃어버린 것도 지갑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어디 다친 것도 아니잖아. 새로운 분야를 경험해 볼 좋은 기회네 럭키비키...라고 외치면서.
그래도 쌀이 너무 먹고 싶어서 근처 식당들을 서성대다 스시집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해물수프(Seafood soup)래서 미역국을 생각하고 시켰는데, 약간 싸구려 레토르트 느낌이 났다. 국수도 거의 끈어지고 삶다 말아져서, 새로운 인종차별 방법이 아닌가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마끼는 맛있었다. 그래도 이 돈이면 한식당가서 순두부 먹었는데, 역시 한식이 짱이다.
구글 리뷰를 보니 되게 맛집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마끼는 맛있었다. 캘리포니아롤이나 마끼 같은 걸 시키면 괜찮을 것 같기도? 어쨋든 수프류는 추천하지 않는다. 우리돈으로 약 2만원인데, 풀무원 우동을 끓여도 이것 보단 낫겠다 진따. 절대 다시 먹을 생각 없음.
집에 그냥 들어가긴 아쉬워서 공원 벤치에 앉았다. 아직 잔디에 앉을 염두는 안나는 걸 보면 현지화가 덜 되었나? 앉아서 수영이한테 편지도 쓰고. 이런 저런 생각 정리도 하면서 있다 왔다.
런던은 어딜가나 공원이 하나씩 있는 것 같다. 평화롭고 여유로워보이는 이 사람들도 사실은 치열한 일상을 이겨내고 있는 거겠지. 확실히 돈 쓰는게 좋다. 사고싶은거 사고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여행하고 지낼 땐 몰랐는데, 먹고 살 걱정해야 되는건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다.
집에와서 주방에서 세탁기를 돌리는데, '조로'라는 인도인을 만났다. 그는 굉장히 훌륭하고 친절해보였는데, 사람 없을 때 택배 어떻게 받냐니까 주소가 필요하냐고 매니저 연락처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아마 내가 잠깐 묵다가는 에어비앤비 이용객인줄 알았나보다. 내일 매니저가 온다고 하니 사람이 없을 땐 택배를 어떻게 받는 지 물어봐야겠다.
엄마는 택배가 없어졌단 말에 왜 밖에서 개고생이냐고 그냥 들어오라고 했다. 뭐 엄청난 지지를 받으려 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도 자식을 밖에 둔 부모마음이 오죽하겠냐싶어서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이렇게 겪으면서 얻는 게 있을거라고, 아직 2주 밖에 안 됬으니 조금 지켜봐달라고.
맞다. 그 이 주동안 영국에서의 내생활은 우당탕탕이다. 블로그에 사진 하나 올리려면 하루 종일 견뎌야 하고, 내가 말하는 바가 잘 전달되지 못해도 그러려니 하고 체념해야 하는. 근데 생각해보면 그거 한국에서도 그런 적 있다. 다만 여기선 그 빈도가 늘어나고 강도가 세졌을 뿐이지.
그러니까 왜 개고생 중이냐는 엄마의 말에 발끈했던건, 나도 어느정도 그 부분에 동조할만큼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을 바로 잡자. 일주일 만에 집도 구했다. 한국에서도 보통 서너 달은 걸리는 걸. 와서 하루도 와서 대충 보낸 날은 없다. 곧 이 모든게 추억으로 회자될만큼 금방 또 이뤄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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