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4년 8월 아홉 번째 일기 (08.14~08.16)_ 타향살이란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것

킹쓔 2024. 8. 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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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4.수 [워홀+15]_ 즐거웠다가 외로웠다가

 

풍요로운 아침상과 대조되는 빈곤의 저녘

 확실히 꽃이 있으니 방 분위기가 좀 더 화사해지는 군. 이젠 제법 안정적으로 보이는 나의 밥상. 아침은 늘 정성을 들여 차려 먹으려고 하는 중. 하 근데 고기만 있으면 딱 인데, 그죠?
 
 밥 먹고 내려왔더니 고장나버린 잠금쇠. 그 전에도 잘 안열리긴 했지만, 여러 번 시도하면 잘 열리길래 말았지. 그런데 이번은 정말 답이 없어서 조이에게 전화를 했다. 청소를 하러 온 폴리가 왜 진작 얘기를 안했냐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얘기를 하라고 했다. 흑흑 한국에 있을 땐 나도 그렇게 살았지만 여기는...

 그래도 연락을 받은 파르토가 내려와서 공구로 몇 번 두들겼더니 작동이 됬다. 작동원리는 나도 그도 모름. 다행히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어서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뭐- 예전에 사무실 번호키도 고장난 적 있는데요. 물론 그 때는 30분만에 아저씨가 와서 다 뜯고 다시 해줬지만. 1시간만에 들어왔으니 영국 치고 일 처리가 빠른 편이지. 
 
   빈곤한 저녘상을 보니 장을 보러 왔다. 매일 가던 테스코가 아니라 새로운 데를 가보고 싶어서 근처 세인즈버리를 찾았다. 아르고스랑 붙어있어서 규모가 어느 정도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마트>정도? 매일 슈퍼마켓만 가다가 또 이런 데 보니까 신나잖아요~ 도파민 뿜뿜해서 잘 돌아다녔지.

정사각형 액자를 찾았지만 가격을 보고 내려놓기

 

킷캣 씨리얼이라니 환장하겠네

 

납작복숭아 대신 찾은 큐티사과

 

 영국은 정말 개인을 존중해 주는 나라다. 그건 마트만 봐도 알 수 있다. 할랄, 비건, 동물복지, 아시안, 식료품부터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하게 선택지가 있다. 정육점에는 돼지, 양, 소, 닭, 대체육이 이 있고, 우유 하나만 해도 세미스킴, 논스킴, 홀 밀크로 칸칸이 여러 제품들이 나열되어있다. 
 
 나와서 보니 깨달았다. 한국은 굉장히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나라였구나. 동료들을 위해 점심메뉴를 통일하고, 회사를 위해 내 시간을 바치고, 더 부강한 한국을 위해 조금은 참는. 나라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친구들을 위해서 내 취향이나 가치관같은 건 잠시 접어두어야 하는 사회. 예전엔 서울도 많이 국제도시라고 느꼈는데, '다양성을 존중해주지 않는다'란 점에서 아직 그 호칭은 좀 이른 것 같네. 

세인즈버리에서 산 바스켓

 그렇게 영국 좋구만~ 잘 왔구만 하면서 신나서 나왔으나. 현실은 치안 때문에 쭈그러들 수 밖에 없는 외국인. 엊그제 레스터스퀘어 칼부림 사건이 생각나서 바스켓으로 배를 가리고 왔다. 찌를 수 있을테면 찔러봐. 

 집에 들어가기엔 아쉬워서 공원에 앉아있다 왔다. 공 가지고 노는 남자애 보니 몸이 근질거려서 운동을 찾아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놀이터에서 노는 애기들 보니 또 외로움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심지가 예전에 밀어주던 그네도 보이고 수영이도 생각나고. 앞으로는 이런 생활의 연속이겠구나. 좋다가도 그리움이 확 몰려드는.


08.15.목 [워홀+16]_조급해 하지 마요, 우리.

 
 아침은 간단하게 과일 샐러드! 물론 이걸 만드는데 칼이 없어서 가위로 껍질 깍고 난리쳤던 건 안 비밀이랍니다 호호. 한국은 광복절이겠구나. 다들 여유로운 휴일을 보내고있는 친구들을 보내니 내가 다 뿌듯했다.

탄수화물이 가득찬 아침

 리버서블 베딩이라 침구를 분홍색으로 바꿔보았다. 되게 방이 화사해진 느낌인데, 아무래도 초록색이 더 내취향에 맞는 것 같다. 일광욕 시킨다 생각하고 놓지뭐. 

사실 제 이불 뒷면은 베이비핑크였습니다.

 점심은 소고기를 구워봤다. 여기와서 처음 구워보는 고기. 영국 고기는 정말 부드럽고 맛있구만. 가격대비 퀄리티가 좋네. 광복절이니까 김치도 좀 꺼내먹어주고, 다 먹고 좀 출출해져서 꼬북칩도 다 먹었다. 사실 안 출출했어도 다 먹었을 거 같긴하다. 

한국스러운 점심밥상 / 꼬북칩 당류 30이었음 ㅠ

 처음에 여기와서 제일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느려터진 인터넷 속도였다. 뭐 하나 올리려면 몇 분이 걸리거나 아니면 중간에 서버리면서,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뭐 근데 며칠이 지나니까 또 적응이 되더라. 업로드 하고 화장실 다녀오고 친구들이랑 얘기하면서 기다리고. 

 그렇게 여기선 사람이 좀 느긋해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금 느긋-해져야 살 수 있다. 한국처럼 빨리빨리 해낼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그런 가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브릭마켓에서 유명한 올드맨

 

비록 지금 먹는건 삼천원짜리 빵이지만, 꼭 고급쵸콜렛을 먹어볼거야

 

 그냥 들어가기엔 아쉬워서 근처 중국마켓을 들렀다. 미역도 있고 잡채도 있고 소주도 있고, 중국당면이랑 일본 제품들도 많고, 여긴 정말 아주 풍요로운 곳이구만. 어떻게보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식탁의 질이 올라갈 수도 있겠어. 새로 문 연 아마존 프레쉬도 들러서 이것저것 사보고. 소스도 무료제공이길래 바베큐랑 마요네즈 소스 몇 개 집어왔다.

 밤에 열심히 가계부를 쓰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옆방의 조이였다. 상하이계 스웨덴인인 그는 심심해서 그런데 얘기 좀 할 수 있겠냐고 했다. 같은 아시안계라 반갑기도 하고,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에 말을 섞어보고 싶었던 터라 별 의심이 없었다. 얼마 전 혼자 생일을 축하하던 그가 좀 쓸쓸해보이기도 했고.

 

 그치만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니지. 때로는 나의 호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운좋게 별일 없이 이야기를 나눳지만, 생각해보니 제한된 공간에서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구나 싶다. 매일 사람을 경계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한 번에 싹 풀어져버리다니. 그리고 그게 내 자신을 큰 곤경에 처하게 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지.


08.16.금 [워홀+17]_ 외국인으로 산다는 건

 

 집에만 있기엔 너무 아까워서요. CV도 제법 써가고, 해서 나왔다. 이 날씨에 방에만 있는 건 유죄인간이라구. 사실 딱히 가고 싶은데는 없었다. 노팅힐 같은데까지 가기엔 너무 멀고, 그냥 인스타에서 나온 5파운드 피자집이나 가보자 싶어서 올드스피탈필즈 마켓으로 갔다.

가는 길에 만난 영국의 푸른 여름 풍경들

 가다보니 우연히 첫 뷰잉 갔던 집들을 지나게 됬다. 알고보니 여기는 유학생들이 많아 꽤 인기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어쩐지 터무니없이 가격이 비싸다 했다. 시내랑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여기도 뭐 나쁘지 않다. 쾌적하고 교통도 편리하고. 

마켓 페스티발에서 그린 그림 / 점심은 면

 막상 피자를 보니 생각보다 부실해보여서 면으로 메뉴를 바꿨다. 나오면 유럽음식만 잔뜩 먹고 살 줄 알았는데, 현실은 일본이나 중국음식을 더 많이 찾게 되는구나. 몇십 년간 쌓아온 취향이란 정말 속일 수 가 없네. 

점점 부내나는 동네로 향하는 중

 세인트폴 대성당까지 가려다가, 그냥 기념비까지만 있다 가기로 했다. 기념비 앞에 핌즈를 파는 펍이 있길래 들어가서 샐러드랑 같이 주문을 해봤다. 사실 샐러드 안 시키려고 했는데 안주가 필요없냐는 말을 여러번 묻길래 그냥 시켰다. 혼자왔으니까 또. 먹다보니 사이다도 땡겨서 저번에 예나가 알려준 사이다도 먹었다.

 

 

런던 대화재 기념비 · Fish St Hill, London EC3R 8AH 영국

★★★★★ · 역사적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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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며칠 있어보니 알겠다. 왜 타향살이하면 술이 느는지. 잘 지내다가도 갑작스러운 외로움이 몰려오면 또 먹먹하게 젖어들고 말거든. 생존에 위협이 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지만, 때로는 굉장히 감당하기 버거울 때가 있는 그런 감정이거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술을 먹나보다. 알콜이 들어가면 그 감정이 조금은 사그라드니까, 여럿이서 먹던 그런 기억에 조금 든든하기도 하고. 

핌즈와 사이다

 창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지켜봤다. 한국에 있을 땐 이런 적 없었는데, 하긴 애써 구경하려고 하지 않아도 만나는 게 사람들이었고, 친구들과 하루 가득찬 일상을 보냈으니까. 그때는 종종 그런 일상이 조금 피곤하기도 했다. 내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도 종종 있었고. 지금은 무리지어 있는 이들을 보며 내 처지를 비교해보는 입장이 되었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창문 밖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함께 있지만 그 그룹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마치 유리천장처럼 투명한 무언가로 격리 되있는 느낌. 좀처럼 저 무리에 낄 수 없을 것 같고 영원히 이 땅에서 이런 이방인으로 살 것만 같은 느낌. 이것 또한 종종 외로움과 함께 찾아오겠지. 타향살이란 이런 일의 반복이겠지. 

 

 

The Monument · 18 Fish St Hill, London EC3R 6DB 영국

★★★★☆ · 호프/생맥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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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도 먹었겠다 단 게 댕겨서 근처 베이커리에서 브라우니를 사러 갔다. 여기 브라우니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확실히 유럽 브라우니는 정말 진하고 다르구만. 대신 칼로리는 700정도 네 하하. 

 

 

Konditor · 15 Cullum St, London EC3M 7JJ 영국

★★★★★ · 제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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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값은 20파운드를 쓰고 왔지만, 도저히 교통비로 5파운드는 내키지 않았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와 잠을 좀 자다가 물을 끓여 마시러 주방으로 올라갔는데. 옆방 파키스탄 남자들 두 명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너네는 둘 이라 좋겠다. 나도 빅뱅노래 틀어놓고 밥 먹고 싶다.

 

 즐거워보이는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문 밖에서 기다리는데, 윗층 청년과 마주쳤다. 그는 -머리는 조금 벗겨졌지만- 블랙펜서의 킬몽거를 닮았다. 고른 치아와 상냥한 말투가 매력적인 킬몽거씨는 주방 앞에 왜 내가 있는지 궁금한 눈빛으로 쳐다봤고, 나는 도둑으로 의심받기 싫어서 그냥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만류하는 나를 뒤로하고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부엌문을 열어제꼈고, 부엌 안 파키스탄 친구들에게 강제로 인사 시켰다. 안경쓴 파키스탄 가이는 왜 밖에서 기다렸냐며, 부엌은 공용공간이며 너 또한 소유권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친구 꺽다리 츤데레는 무심하게 내 앞을 닦아주고, 냄비에 불 키는 걸 도와줬다. 조금 따뜻해진 느낌.

 

 그리고 물이 끓는 동안 이런 저런 질문을 받았다. 파운드는 한화로 얼마인지, 올 때 비행기 값은 얼마나 들었냐, 한국은 어떤 곳이냐. 생각해보니 다 나에 대한 게 아니라 내가 속한 그룹에 대해 궁금한 거네. 아시안들 특징인가. 중국이랑 한국이랑 많이 다르냐는 그의 질문에 인도랑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만큼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늘은 이력서를 한 줄도 보지 않았다. 이렇게 잘 쉬었으니 내일은 좀 더 열일하겠지? 남들 놀 때 일 해보자싶어서 어디 못가게 아마존 택배도 하나 더 시켰다. 사실 어디서 깨졌는 지 모를 내 휴대폰 액정의 수리가 시급한데,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어서... 제발 내일은 아마존 택배에 성공하길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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