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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4년 9월 여덟 번 째 일기 (09.15~09.16)_ 여전히 그리고 드디어

by 킹쓔 202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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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일 [워홀+48]_여전히 미숙하고 미루기 좋아하는 나

 

 아침부터 조금 짜증나는 일들이 생겼다. 윗 집 미트로가 휴지를 넣고 빨래를 한 덕에 세탁기가 엉망이 되었고, 그 잔재물은 고스란히 내 빨래에 묻어나왔다. 검은 니트라 먼지가 눈에 띄었는데 잘 떨어지지도 않아 좀 짜증이 났다. 은진이가 보낸 택배는 세관에 잡혔다. 관세를 물지 않으면 배송해주지 않겠다는 우편물이 와서 조금 성질이 났다.

 

 배송비만 20만원 넘게 냈는데, 대체 얼마를 더 뜯어가고 싶은거냐고. 물건 포장 안 뜯어서 보냈냐고 전화하니까 열심히 보냈더니 뭐라고 하는 거냐는 생도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래- 돈 내면 되지. 어쩐지 너무 안 오더라. 

 어제 산 에그누들과 양고기를 사서 볶아 먹었다. 아무래도 저번 한인 식료품점에서 굴소스를 샀어야 했다. 로즈마리와 얼그레이티백을 풀어 복숭아조림도 만들었다. 꿀이 없어서 그냥 스테비아를 넣고 졸여 시럽을 만들었다. 자일로스 언제오냐... 디온네만 다녀오면 유독 요리에 더 갈증이 생겨서 오는 것 같다.

 

 저녘을 먹으러 올라갔다가 식사 준비 중인 사갈과 파힐을 마주쳤다. 또 부자드립치면서 일 자리로 스몰토크를 시도하길래 나도 모르게 너넨 정말 배려가 없구나라며 급발진을 해버렸다. 당황한 둘을 보며 순간의 감정 조차 컨트롤 하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멋쩍어하며 나를 위로하던 둘. 당장 내일 모레 논문 제출을 앞둔 사갈은 그 소중한 시간을 짬내서 나를 격려했다.

 

  아직도 여전히 미숙하구나 나는. 그리고 여전히 할 일을 미루고. 머라이카에게 줄 포트폴리오는 어제부터 미뤄져서 결국 일요일 자정이 넘어가서야 작성을 시작했다. 그녀에게도 답이 늦는 바람에 사실 더 미뤄버린 것도 있다. 새벽 한 시가 되서야 일 다운 일을 시작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윗집 미트로였다. 

첫 영국 파파이스

   미트로는 파파이스 쇼핑백을 건냈다. 왜 주는 지는 나도 모른다. 고마워 하는 날 뒤로 내방을 스캔하던 그 앞에서 나는 발가 벗겨진 기분이었다. 왜냐면 밀린 빨래를 널어두느라 방이 지저분했었고, 문 가까이 걸어둔 속옷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아무말없이 쭉 내 방을 둘러보던 그가 말했다.

 

 "니방은 참 작구나." 하. 저번부터 느낀 건데, 여기 사람들은 참 필터 없이 말하는구나…물론 쇼분과 미트로만 그렇다. 정말 무심하고 무신경한 두 방글라데시 남자들...이런 성격으로 어떻게 이쉬타랑 결혼한거야. 


09.16.월 [워홀+49]_ 처음으로 영국 돈을 번 날

 

 오늘은 첫 트라이얼이 있는 날. 지난 번에 면접을 본 한식당에서 2주간 일(트라이얼) 해본 다음 정식으로 채용 여부가 결정된다. 두 시간 뿐이긴 하지만 조금 긴장되서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청량한 런던 하늘

 일은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바쁘고 적당히 어렵지 않았다. 물론 오랜만의 서빙이고 첫 날이라 잔 실수가 있긴 했지만, 엄청 힘들진 않았다. 주문을 받고 잔심부름을 해내면서 죽집 알바를 하던 대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한국인 손님은 거의 없었다. 영어로 한국음식을 소개하거나, 여기 레스토랑 문화 등 새로 배운 점들도 많고. 

벌써 물든 가을의 색깔

 여기를 소개해준 윤이 네 명이나 면접을 봤는데 나 말곤 아무도 트라이얼까진 가지 못했다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잠깐 경험하며 느낀 거지만 이 자리가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앞서 판단했던 대로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거절했다면 알 지 못했을 느낌. 여기까지 와서 고작 한 식당 잡이라며 기피했던 내 오만함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진중하게 여기지 않던 그 자리는 생각보다 괜찮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자리였을 것이다.

 집으로 오는 길엔 지하철을 타지 않았다. 대신 1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왔다. 지난 번 킹스크로스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있어서 어렵지 않았다. 이제 이스트 런던은 어느 정도 길눈이 트인 것 같다. 

화창한 런던 브릭레인마켓 풍경

 

 런치타임에 일을 하느라, 점심을 못 먹어서 배가 고팠다. 어서 밥을 먹고 싶었는데 메인도어 열쇠를 또 깜빡했었다. 밖에서 30분 정도 기다려봤는데 좀처럼 나오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사갈에게 연락을 했다. 사갈은 문을 열어주면서 터키쉬 디저트 한 판을 들고 와서 잔뜩 나눠줬다. 

샤갈이 준 터키쉬디저트

 맛만 볼까 한 두 개를 집어 먹어봤는데, 확실히 맛있었다. 페스츄리결이 한 겹 한 겹 살아있는 느낌이랄까. 디저트는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유럽만 잘 만드는 줄 알았는데, 터키 디저트도 꽤 맛있는 것 같다. 특히 이런 꿀 들어간 걸 잘 만드는 듯.

 

 식사 후에 마주친 파르토에게 내 앞 방 남자애의 흡연에 대해 컴플레인 했다. 혹시 네 친구 담배 피냐니까 "아마도(Probably)" 란다. 그의 흡연 여부를 전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빤히 알고 있었단 점이 조금 화가 났다. 조심스레 물어본 건데 그럼 지 친구라고 봐주는 거야 뭐야...고스란히 그 감정은 얼굴에 드러났다. 어쨋든 우리 플랫은 금연인 거 아니냐고 했더니 주의를 주겠단다. 아니 근데 무슬림들은 담배피면 안되는 거 아니었나? 일단 쟤는 무슬림인지도 모르지...

 

  밤 10시가 되자 머라이카에게 보냈던 문자 답장이 왔다. 토요일날 보낸 건데 월요일 밤에 오는 답장. 그래 나는 지금 온 거라도 감사해야되는 입장이지. 부랴부랴 미루던 포트폴리오도 다시 작성하고, 아까 배운 레스토랑 매뉴얼도 다시 정리했다.

 

 그렇게 새벽 한 시 반이 다되어갈 쯤, 내 앞 방 남자애가 왠 여자애랑 문 앞에서 떠들었다. 내가 문을 열어 눈치를 줘도 얘넨 문 앞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정말 기본 예의란 개념에 대해 모르는 걸까...유독 서남 아시아 애들이 소음에 관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사갈이 새벽에 시끄럽게 불평한 거 보면 걍 케바케 사바사인가 싶기도 하고.

 

 어쨋든 오늘은 처음으로 돈을 벌어봤다. 여기 온 지 50일이 되기 전에 드디어 뭔 가를 했다. 비록 2시간이라 큰 돈은 아니지만, 매일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쓰기만 하다 처음으로 영국 돈을 벌었단 생각에 기분이 좀 좋아졌다. 머라이카가 제안한 일 자리가 되면 참 좋겠지만, 안된다 해도 일단 손에 쥔 게 있으니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다. 히히 내일은 늦게 일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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