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2.목 [워홀+45]_ 영국의 대중교통이란
영국에서는 시간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기 힘든 것 같다. 왜냐면 대중교통이 너무 제멋대로다. 버스는 가다가 멈추거나, 이유도 모른 채 안 올 때가 있다. 안그래도 아침에 이불 빨래때문에 늦었는데 버스도 기차도 연착되서 디온에게 말한 시간보다 더 늦게 도착했다.
이젠 이런 연착들에 제법 익숙해져서, 크게 초조하지도 않았다. 대신 역무원에게 상황을 묻고,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고, 자주 못 보던 일몰까지 감상하는 여유를 누렸다. 럭키비키잖아.
지난 번과 달리 이번엔 디온이 매 끼니 풍성하게 밥을 챙겨줬다. 아침도 잘 안 먹는 양반이 이렇게 챙겨주기 쉽지 않을텐데, 신경 써주고 있는게 많이 느껴졌다. 디저트로는 트라이팟도 먹어보고, 디온이 포트넘앤메이슨 티를 선물로 줬다. 이거 딱 사려고 했는데 흐흐. 센스쟁이 커플들.
또 하나 디온의 배려가 느껴졌던 건 무드등이었다. 저번엔 고향느낌나게 해준다고 BTS인형들을 침실에 놨는데, 이번엔 예쁜 무드등이 있었다. 주황빛 조명 온도처럼 마음까지 따뜻해지는밤이었다.
09.13.금 [워홀+46]_ 내 생애 첫 럭비경기
오늘도 상 다리가 부러지는 아침상. 야채만 조금 있으면 참 좋을텐데 나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여기 애들은 정말 간편식품을 애용하는구나.
오후엔 미니버스를 타고 럭비를 보러갔다. 스티브의 아들 셉, 제스, 그의 친구인 대런과 그의 아내 앨리스, 이웃 머라이카와 마르셀, 니브와 그녀의 남자친구 윌, 그리고 엘리랑 나, 디온까지 모두 12명이 함께 경기장으로 갔다.
이들은 노스햄스턴 세인트의 엄청난 팬이라다. 그래서 같이 기념품샵도 들러서 응원복도 사고, 드레스코드도 초록, 노랑, 검정으로 맞춰입고 왔다. 한국에 있을 때 부터 한번 쯤은 스포츠 경기를 라이브로 보고 싶었는데, 그 소원을 여기서 풉니다.
럭비 경기를 볼 땐 맥주를 마시는 게 전통이란다. 그래야 추위도 덜 타고 더 신나게 경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경기 룰을 잘 몰라서 걱정했는데 몇 판 보다보니 흐름을 이해하는게 어렵지 않았다. 정말 탄탄한 몸의 남자들이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가, 격한 몸 싸움을 하며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작은 공 하나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광경은 정말이지 잊기 힘든 모습이었다.
끝나고는 디온네 집에서 애프터 파티를 가졌다. 여럿이서 둘러쌓여 맥주를 들고서 서로 대화도 하고 노래도 들었다. 물론 나는 아주 좋은 경청자였고.
영화에서 보면 파티에서 동 떨어진 채 코너에서 뭔가를 훌쩍이는 사람들이 있었지. 이 날은 그게 바로 나였다. 젠장- 안 그래도 알아듣기 힘든데 11명이 서로 얘기하니 더 정신 없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대화를 끼워주려고 노력하거나, 계속 괜찮냐고 챙겨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나 미안하기도 했다.
사실 이 날은 정말 내가 있는 곳이 '영국' 같다고 느낀 몇 안되는 날들 중 하나였다. 플랫에 있을 땐 늘 서남아시아계 무슬림들에 둘러 쌓여있었고, 밖을 나가도 다양한 인종들로 가득 찬게 내가 있던 곳이었으니까.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미디어 속 영국인, 즉 백인은 오히려 수도에서 귀한 존재였다.
여기, 노스햄스턴에서 아시안은 오로지 나 혼자였다. 그 사실이 그닥 나쁘지 않게 다가왔던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종종 그게 차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기차역 정류장의 백인 아이들이 흘겨보며 킥킥댄다거나- 그것조차 크게 나쁘지 않았다. 내가 있던 런던이 영국의 도시라기보다는 미국 같은 이민자들의 공간처럼 느껴졌기에, 차라리 그런 경험이 신선하게 다가왔달까?
과거 낯선 환경에 두려워했던 내가 떠올랐다. 5년 전 유럽여행을 위해 처음 런던에 내렸을 때 나는 꽤나 긴장하고 떨고 있었다.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낯설고 무섭게 다가왔다. 지금은 완전 즐기지는 못해도 이렇게 마음이 편안했다. 디온이 함께 해서 일 수도 있고, 내가 전보다 성장했을 수도 있고. 이유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전보다 나는 조금 나아졌음을 깨달은 날 이었다.
09.14.토 [워홀+47]_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침엔 마침내 머라이카와 일 자리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다. 머라이카는 디온네 이웃인 아일랜드계 마케터인데, 스티브의 부탁으로 내 CV를 검토했던 사람이다. 기껏해야 이력서에 대한 코멘트나 받을 거라 생각하고 희망연봉이나 경력인정이 얼마나 가능할 지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자리를 소개해준다고 해서 뜻밖이었다.
12월에 비자가 만료되는 근무자가 있는데, 그 대체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회사 입장에선 비자신청비용이 꽤 커서 감당하기 힘드니 자리가 나면 지원해보라고 한다. 물론 합격까지 완벽하게는 장담 못한다고 한다. 그래도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 조차 감사하게 느껴졌다.
럭비경기를 함께했던 멤버들을 모두 배웅하고 니브와 김밥을 만들었다. 한국음식이 그리웠다던 그 애를 위해 이것 저것 준비했지만 재료부터 조리도구까지 많이 열악했다. 그래도 디온네 집에 온 이후로 한국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김밥도 만들고, 한국영화나 아이돌같은 한류에 대해 얘기하고, 가끔은 한국어도 하고. 깔끔하고 따뜻한 이 집에서 그리웠던 고향을 잠시나마 느끼고 다시 런던으로 떠났다.
집으로 돌아와 저녘을 먹고 있는데 샤갈이 왔다. 곧 대학동문들과 파티가 있어서 잠깐 들렀다가 가야 한단다. 파티가 있는 곳은 플랫이랑 완전 반대편인데, 나 때문에 들렀나...어제부터 나 빼고 노니까 재밌냐고 좀 칭얼댔더니 짜식이 또 왔네. 히히 기특한 녀석. 네 덕에 그래도 제법 이 고독함을 버틸만하다.
추석을 맞아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송편을 보내주고 싶어하는 주희룽부터 전 먹었냐고 물어보는 수영이나 엄마, 심지, 체육관 친구들 기타 등등. 아마 뉴몰든으로 나가거나 찬 거리를 사다 전을 만들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왠지 더 닿을 수 없는 한국이 그리워질 것 같아서.
그래도 저는 잘 있습니다. 모두들. 항상 저의 빈 자리를 느끼고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제법 만족스러운 이 영국생활에 아쉬운 게 딱 하나가 있다면 그건 여러분이 없다는 거 겠죠.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저도 문득 여러분의 빈 자리가 떠오르면 울컥 가슴이 먹먹해지고 맙니다. 비록 우리가 멀리 떨어져있지만 마음 만은 늘 함께하고있음을 기억해주길. 항상 여러분들을 응원하는 당신의 친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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