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8.일 [워홀+41]_ 특별할 것 없는 주말의 끝
오늘은 꼭 오븐을 사용해서 요리를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이 시간 이후로 다시는 오븐을 사용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불 켜는데 스위치 못 찾아서 해매고, 엉뚱한 곳에 불 키고. 꺼야 될 때는 또 불이 안 꺼져서 한 참을 헤맸다.
요리하는 내내 헨젤과 그레텔 속 마녀가 된 기분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 앞에서 땀이나 뻘뻘 흘렸고, 요리 후엔 기름 범벅인 오븐 치우느라 난리 부르스였으니까. 이 정도면 사서 고생 맞네. 그렇다고 맛도 빼어나게 좋았던 것도 아니니 당분간은 우리 안녕이다.
런던의 날씨는 희한하다. 한 쪽에서는 비가 부슬거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가 반짝 거린다. 비 온 뒤에 무지개 뜬다더니, 여기 와서 처음 보는데 참 예쁘네.
저녘 장을 보러 왔는데, 마트가 문을 닫았다. 일요일이라 문을 일찍 닫았던 건데, 왜 구글 지도는 영업 중이라고 말한 거 지 참나.
빗줄기가 약해지는 틈을 노려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점점 바람이 거세지면서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지하철역에서 잠깐 비를 피하고 있는데, 쇼룹을 만났다. 사람을 녹일 정도로 예쁘게 웃는 윗 집 그 애. 일터에서 돌아오는 중이라고 이것 저것 말을 걸었는데, 후후…못 알아듣겠더라 하하.
저녘을 먹는데 진의 여자친구가 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인이라 주방이 떠나가도록 꺄르륵 거리며 얘기를 했다. 귀엽고 솔직한 매력의 그녀.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고 향수를 느끼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싶었다. 영어가 아닌 모국어의 편리함을 마음껏 즐기고 있던 무렵, 퇴근한 샤갈이 올라왔고 대화에 끼려는 게 보였다.
여전히 그는 처음에 내게 그랬던 것처럼, 집이나 월급에 관해 물어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이번엔 내가 오해 받지 않도록 중간에서 도왔지. 사실 여기 처음 왔을 땐 굉장히 무질서하다고 생각했다. 밤늦게 먹는 저녁, 깔끔하지 못한 뒷 정리, 다소 시끄러운 움직임 등,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것들 천지였다.
물론 지금은 잘 안다. 쉬는 시간 없는 강도 높은 근무로 한참이 지나서 밖에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걸, 완벽하지 못한 뒷 정리는 사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느라 바쁘고 지쳐 세세하게 신경 쓰지 못하는 것, 오래된 건물이 의도치 않은 소음을 발생시키는 것, 사실 그 어느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09.09.월 [워홀+42]_ 공허함이 가득찬 하루
아침에 문 열자마자 어제 못 들른 세인즈버리부터 털어줬다. 테팔 후라이팬 15파운드라고 세일하는 줄 알고 샀는데, 영수증보니 가격표랑 다르길래 바로 고객센터에서 환불했다. 아마존 콜센터에다 전화도 잘하는 걸 뭐, 이젠 제법 이런 일도 어렵지 않게 해낸다. 게다가 무거운 거 싫다고 인터넷으로만 물 시키던 사람은 이젠 5L짜리 생수 사고 어깨에 이고 옵니다. 과거의 나여 보고 있는가 자랑스러워하려무나.
영국왕실에서 먹는다는 골든저지우유(Golden Jersey Milk)도 사봤다. 뭐가 둥둥 떠다니길래 잘못 산 건 가 싶어서 디온에게 물어보니 골든탑(golden top), 유지방이란다. 확실히 맛이 깊고 풍부했다. 물론 그만큼 칼로리도 더 높고. 에휴- 맛있는 것들이란.
한국에선 접하기 힘들었던 이런 아이템들도 경험해보고, 요즘은 전보다 영어로 말하는 게 겁나지 않는다. 답답함이 하늘을 뚫고 나가는 건지 밤에 나가는 것도 생각보단 덜 무서운 걸 보면, 시간이 제법 흐른만큼 여기 생활에 적응은 좀 한 것 같은데. 어쩐지 그럴수록 점점 내 자신은 초라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과 직결되는 돈, 그걸 한 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하루 하루을 보내다보니 내 가치도 제로가 된 기분이랄까. 요즘은 텅 빈 것 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 사실 별 거 아닌 투정이란 것도 안다. 인생 3n년차에게 이깟 백수놀이쯤은 별 것도 아니지. 일자리야 시간과 질의 문제지 언젠가 구해질거란 걸 분명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문제니까. 이 타국에서 그 일 자리는 생계와 직결되어있고, 만약 그렇지못하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걸. 시한폭탄의 타임워치가 째깍 거리는 거 마냥, 매일 보이는 통장 잔고가 마음을 조여온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 문득 마음이 불안해진다. 과연 지금 이게 최선이냐고, 뭔가 더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다그치면서.
처음과 달리 점점 여기 생활에 애정이 생긴다. 런던에 바로 막 왔을 땐, 솔직히 여기 생활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적도 많다. 택배나 도난 등 한국의 안전한 치안과 편리함은 찾을 수 없었고 뷰잉 때는 시내와 동 떨어진 데다가 지저분하고 시궁창 냄새가 가득한 플랫들을 둘러보면서 그리 좋은 미래를 예상할 순 없어보였다.
하지만 이젠 괜찮은 집도 구하고, 볼 때 마다 뭐라도 하나 주려는 정많은 이웃들도 만나고, 대충 여기 지리도 파악하게 되는 등 런던생활에 꽤 애정이 생긴다. 그래서 돌아가야 할 상황이 상상을 하면, 벌써 많이 쓸쓸하고 아쉬워진다.
저녘엔 디온이 물어봤던 소주를 찾으러 티엔티엔 마켓에 갔다. 대체 걔가 말하는 fuzzy one이 뭐지…직원도 모른단다. 내일 다시 물어보고 GP검진 올 때 사러와야겠다.
윗집 슈룹은 밤에 자주 돌아다니는 것 같다. 그래서 종종 플랫 입구에서 마주치곤 한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네, 그의 룸메이트인 파르토랑 내 방에 머무르는 게스트인지 세입자인지 모를 그 남자애랑 셋이 어디 가는 중인듯 했다.
혹시 지금 세탁기 돌리는 거 네 거냐고 묻길래, 맞다고 했더니 끝나면 자기 거 넣으려고 물어봤단다. 그 애는 차분하고 상냥하지만 종종 사감 선생님처럼 이상한 거에 확고하게 말하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꽉 막힌 인상을 줄 때도 있고. 아니 올라와보니 빨래 끝나지도 않았더만 왜 재촉이람. 하튼 웃겨 정말.
9시까지 쨍쨍하던 런던 하늘은 요즘 7시만 되면 깜깜해진다. 반팔만 입고 나가기엔 약간 쌀쌀하고 정말 가을이 다가온 게 느껴진다. 다가온 계절의 감성을 느끼고 싶은건지 우울함에 그냥 묻혀살고 싶은건지 아무 생각없이 침대에 누워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은 요즘, 하루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애써 덮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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