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4.수 [워홀+37]_런던 라이프 즐기기, 뮤지컬 관람
아침에 장 보러 가는 길, 잡초가 가득하던 역 앞에 텃밭은 어느 새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었다. 여기 관리할 자원 봉사자 구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많이 쭈구려서 무릎 아플까봐 고민했더니 이미 기회는 사라졌구만.
찬 거리를 사다가 저쪽 책 코너에 눈이 갔다. 며칠 째 눈에 밟히는 10파운드 짜리 내셔널 지오그래픽. 파리의 구석구석 탐방이라니 안 사고 배기겠어? 네 안삽니다-못 산다는 표현이 더 맞지만. 왜냐면 실직자는 돈을 아껴야 하니까요.
아침 먹는데 파힐이 자기가 만든 거라고 무슨 떡빵 같은 걸 줬다. 인도음식이라는데 이름 까먹었네. 보통 파키스탄 남자들은 요리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파힐은 칼질도 그렇고 음식 만드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슬리퍼를 드디어 받았습니다. 드디어 물만 보면 피해야 하는 다이소 젖은 슬리퍼 졸업이다. 아마존 프라임으로 당일 배송 시킨건데 어제 잠깐 사이에 택배기사님이 지나가셔서 못 받았지 뭐야. 분명 주문사항에 오면 전화를 달라고 번호까지 적어뒀지만, 그 누구도 연락 한 적이 없다. 흐흐 알아서 갖다 주고 중요한 건 연락해주는 한국 택배시스템 최고야 정말.
저녘엔 뮤지컬을 보러 왔다.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뮤지컬의 중심으로 불리는 런던 웨스트 엔드는 다양하고 수준 높은 공연들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몇몇 작품들은 데이시트로 남는 표를 판매하기도 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뮤지컬 예매 전문사이트인 Tix에서 30파운드에 위키드 데이시트를 구매했다. Tix앱을 다운받으면 표가 풀릴 때 마다 알람이 울린다.
지난 번에 1층 자리를 얻었는데 생활비가 얼마남지 않은 문제로 고민하다 날렸던게 후회가 되서 다시 도전했다. 이러다 한국 다시 돌아가야되면… 후회 할 것 같아서. 아쉽게도 이번엔 2층 자리에 당첨되었네.
위키드가 상영중인 극장은 빅토리아 극장으로 얼 마 전에 예나를 바래다 주던 그 빅토리아역이다. 온 김에 그 때 생각도 나고 시간도 좀 여유로워서 기차역을 구경 중이었는데 피아노를 발견했다.
박 터지던 유스턴역 피아노랑은 달리, 여기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옳다구나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 뚱땅뚱땅 쳐봤다. 혼자 있는 줄 알고 꽤 오래 피아노를 잡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내가 황급히 자리를 정리하자 단발 머리의 그 젊은 남자애는 내 연주가 어메이징했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닌 거 알고, 우리나라였다면 더 냉정하고 인색한 평가를 받았을 듯 하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늘 좋은 면을 바라보고 상대방에게 예쁘게 말해주려는 여기 사람들의 태도는 참 배우고 싶다.
이윽고 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피아노 선율들에 기차 경적소리가 스며들어 더 아련하고 그윽해졌다. 연주영상을 찍어서 내 스토리에 업로드 해도 되냐고 물으니, 괜찮으면 인스타 교환 하고 본인 태그도 해달란다. 알고보니 핵인싸였던 그 애, 이탈리아와 영국을 오가는 얘는 팔로워가 천 명이 넘었다. 대화를 좀 나누다가 걔도 기차 타러 가야 되고 나도 공연 시간이 임박해서 서둘러 역을 떠났다.
빅토리아역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은 오래 전부터 위키드를 공연해 온 전통 있는 곳이다. 그 명성에 맞게 건물 외관부터 내부까지 작품의 컨셉에 맞게 꾸며져 있다.
뮤지컬 위키드 공연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내 생애 가장 최고의 뮤지컬이라고 말할 정도로. 너무 좋았어서 런던에서 계속 오래오래 더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내 자리는 2층 Dress cirlce C열 3, 13번째 좌석이었다. 오히려 지난 번 가능했던 1층보다 2층 좌석이 화려한 무대 연출을 보기에 더 적합했던 것 같다.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초록 마녀와 착한 마녀의 성장과 모험을 다룬 이야기다. 다혈질이지만 따뜻하고 재능있는 알파바와 예쁘고 매력이 넘치지만 가끔 푼수같은 글린다는 둘 다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알파바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냉대와 멸시를 받을 땐-심지어 가족 조차도-이 곳에서 늘 이방인인 내 모습과 겹쳐보였다. 파퓰러를 열창하며 예쁘고 매력적인 글린다의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싶어하고 때로는 허영심 넘치는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세계 2위 인기 뮤지컬답게 화려한 의상과 압도적인 무대 연출이 풍성한 볼 거리를 제공한다. 주인공 글린다의 의상도 몇 억이 넘고, 엑스트라 의상들 마저 철저히 관리되고 보험에 가입되있을 정도라고 한다. 더불어 브로드웨이 뮤지컬답게 한국인에겐 친숙한 미국 억양의 영어라서 더 잘 들렸던 것 같다.
사실 영어를 완벽하게 잘 알아듣는 편이 아니라 내용을 이해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물론 짜잘짜잘하고 세세하게 다 이해했던 건 아니지만, 큰 흐름은 대강 파악이 됬다. 게다가 화려한 무대장치와 빛나는 의상과 퍼포먼스만 봐도 눈 호강 제대로 하던걸 뭐. 곧 아리아나 그란데를 주연으로 영화로 개봉한다고 하니, 런던에 오는 사람이면 꼭 필수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집에 오는 길은 뮤지컬 위키드의 넘버 중 하나인 Popular를 흥얼거리면서 왔다. 집 가는 길이 영화 촬영 중이라 돌아가야 했지만 그것마저 이 기분 좋음을 오래 음미할 수 있게해서 좋았다.
그러다 문득 또 그리움이 먹물처럼 마음에 젖어 들었다. 이 좋은 걸 은진이랑 같이 봤으면 좋았을텐데. 곧 추석이라는데 연휴 때 왔으면, 같이 볼 수 있을텐데. 내가 좀 자리 잡았으면 놀러오라고 할 수 있었을텐데, 아직 일도 숙소를 제공할 능력도 안되는 형편이 못내 아쉬웠다. 근데 뭐- 어떻게든 곧 되겠지. 지금 이런 생각들이 한 때의 추억으로 남을만큼... 어서 내가 잘 정착했으면 좋겠다. 하루 빨리 그렇게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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