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9.목 [워홀+30]_ 쉬어가는 하루
어제까지 너무 바쁜 일상들을 보낸 터라 오늘은 살짝 쉬고 싶었다. 청소도 좀 하면서. 방문도 반 자동으로 바뀌고- 좀 뒹굴거리다보니 밥 먹을 때가 되서 세인즈버리로 가던 중 쿠말이랑 마주쳤다. 뭐 사러 가녜서 닭 사러 간다고 했더니 자기 닭 있다고 그거 먹재서 알았다고 했다.
쿠말도 뭐 요리를 엄청 잘 하는 건 아닌 듯 하다. 밥은 주로 파힐이 하니까. 그래도 요리를 좋아하는 그가 향신료를 잘 갖춰놓은 덕에 그거 몇 개 써서 제법 그럴 듯한 치킨 요리를 해냈다. 밥을 하고 있는데 앞방에 쇼분이 와서 소고기로 비리아니를 했다. 그가 압력밥솥으로 요리를 할 때 마다 어렸을 적 살던 한국으로 돌아간 것 같아 반갑다.
사실 난 닭다리 하나면 됬는데 쿠말이 네 개를 줬다. 달다구리 먹으러 가자면서 아이스크림도 사줬는데, 전부터 먹고 싶던 벤앤제리를 사줘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돌아오니 쇼분이 비리아니가 완성됬다면서 또 한 그릇 건내줬다. 그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윗집 아자씨가 단 거 좋아하냐면서 하나 주셨다. 매운 거 좋아하면 고기도 먹어보라고 또 주시고. 오늘도 밥을 세 끼나 먹었다. 거절을 모르는 한국인과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야하는 무슬림들이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앉아서 식사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오늘 들었던 것 중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거 였다. "무슬림들에게 뭔가를 줄 땐 꼭 오른손으로 줄 것." 그들에게 왼손은 화장실 볼 일 볼때나 쓰는 손이라, 그 손으로 뭘 주는 건 모욕의 의미가 있단다. 아이고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 내가 뭘 줄 때마다 그렇게 떨떠름 하게 받았구만.
저녘에 디온에게 연락이 왔다. 친구가 내 CV를 봤는데 희망연봉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구글에서 평균월급 검색해보고 대충 5천파운드(한화 약 7백만원 정도)랬더니 약간 어이털려 하는 것 같았다. 하하. 제가 실질적인 여기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런듯요.
어쨋든 디온네 가족들이 나보다 더 열심히 내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있다. 정작 나는 무기력함에 반쯤 놔버리고 있는데, 디온 남편인 스티브가 이웃의 마케터에게 내 CV를 검토해주겠다고 가져갔고, 니브는 본인이 일하던 NHS 인사과에 내 이력서를 전달했고 어쩌면 인터뷰까지 이어질 듯 하다. 쿠말도 일자리가 원한다면 본인이 있는 마트에서 일하게 도와주겠다고,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다.
솔직히 워홀 온 이유가 '자립'인데, 여기서 일을 구할 땐 그걸 실현하기 조금 힘든 것 같다. 10군데의 프렛에 연락을 했는데 한 군데서도 연락이 없는 건 좀 오바지 않나. 스타벅스도 그렇고. 너무 남에게 의존하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면서도, 어딜가나 레퍼런스를 요구하는 이 사회에서 이런 인맥 활용 또한 내 능력이려니 하고 둘러대면...너무 좀 구실 좋은 핑계 같으려나.
08.30.금 [워홀+31]_ 런던 주짓수 체험
쿠말이 어제 방문 잠금쇠가 고장난 걸 수리해야 될 것 같다고, 플랫매니저인 파르토한테 말해 달란다. 마침 쇼룹이 지나가길래 파르토가 자기 룸메라고 뭐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하라길래, 옆방 문 고장 났다고 수리해야 될 것 같다고 했더니 그걸 왜 니가 말하냐고 당사자가 말해야지라고 좀 혼내듯이 말했다. 아니 말할 수도 있는거지뭐...
그리고 저녘에 쿠말이 혹시 자기 노트북 못 봤냐고 했다. 니 노트북을 내가 어떻게 알겠니- 나한테 맡긴 적도 없는데라고 대답하면서 자기가 어따놓고 나한테 찾는건지 깊어서 조금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알고보니 쿠말방에 도둑이 들었고 노트북 뿐 아니라 같이 사는 파힐 아이패드랑 캐리어, 향수까지 싹 다 도둑 맞았다고 했다.
머리가 띵했다. 안그래도 쿠말이 방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해서 그 방에 들어갔었는데. 게다가 방이 넓어서 좋겠다며 부럽다는 말을 연신 남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문 고장난 건 나밖에 모르는데, 범인으로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라 조금 껄끄러워졌다.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지 지하철도 잘못탔다. 역으로 가는 길부터 헤맸고- 잘못된 플랫폼에서 타느라 엉뚱한 곳에 내렸다. 게다가 지하철이 갑자기 서는 바람에 저녘에 예약해뒀던 주짓수 수업에도 30분 정도 늦게 되었다.
그래도 그 덕에 노을을 봤네. 안전 문제로 늦은 시간엔 나오지 않았기에,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런던의 노을. 하늘이 이렇게 아름답게 물드는 구나. 조급한 마음은 잠시 뒤로 하고 핑크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감상했다.
다행히 엄청 화를 낼 줄 알았던 마틴 관장님은 반갑게 날 맞아주셨다. 주짓수를 처음 해봤냐는 말에 그냥 몇 달 다녔다고 얼버무렸지만, 의외로 이것 저것 곧 잘 해내곤 했다. 약간 몰카같긴 하지만 그래서 이 전에 블루벨트였음을 고백하게 되었네...
확실히 체육관 문화가 내가 다니던 데랑은 많이 달랐다. 자유로운듯하면서도 말 끝마다 "오쓰"를 외쳐서 약간 깍듯한 문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여기 애들은 풀메를 하고 운동을 해서 신기했다. 수업은 재밌었지만 등록은 못할 것 같다... 너무 멀어.
08.31.토 [워홀+32]_ 꽤 여유로운 주말
오랜만에 여유로운 주말 아침을 보내는 중. 영국인처럼 잉글리쉬 진하게 탄 블랙티에 우유 잔뜩 넣어서 브렉퍼스트티도 한 잔 때려주고. 지난 번에 산 피스타치오 쿠키랑 쿠말이 준 카스테라도 곁들여 적당한 디저트 섭취도 해줬다. 하루 종일 밀린 블로그도 올리고, 친구들이랑 통화하고 적당히 낮잠도 잤더니 5시 정도로 하루가 거의 다 지나있었다.
주말을 이렇게 보내기는 아쉬워서 세인즈버리에 가서 저녘 장거리를 봤다. 매일 밥을 얻어먹었던 게 조금 미안해서 쿠말 퇴근시간에 맞춰 뭘 좀 만들어봤다. 인스타에서 본 누룽지 통닭인데 외국애들이 콘치즈를 좋아한다고 해서 같이 해봤다.
누룽지는 태어나서 처음해보는데 제법 그럴하게 만들어져서 뿌듯했다. 거의 다 차려놓고 저녘 밥 집에서 먹을거지라고 물었더니 밖에서 먹고 온 다는 녀석…일부러 늦게 준비했는데, 괜찮아.. I’m ok I’m fine 댕댕댕댕댕~
혼자 밥 먹는 게 안되보였는지 우리집 라따뚜이가 또 마중을 나왔다. 매일 보다보니 정들었는지 이젠 제법 귀엽게 보일정도다. 그래 뭐 여기 플랫에 부엌은 공용공간이니까, 너랑도 쉐어할 수 있지.
쿠말이 노트북을 잠깐 빌려줄 수 있냐고 연락이 왔다. 과제해야되는데 펜도 없다고 해서 빌려주러 갔다. 필요하면 내 탭을 쓰라니까 어차피 내일 살 거란다. 삼성살까 애플살까 어떤게 좋은 것 같아해서 망설임없이 애플을 추천했다. 사실 맥북 안써봤는데 사람들이 맥북이 더 좋다고 하니까 뭐. 하하- 미안해요 재드래곤.
어쨋든 이렇게 8월이 마무리가 되었다. 영국에 온 지 이제 한달 쯤 되어가고, 나름 아는 사람도 생기고 뭐 나쁘진 않다. 물론 아무리 그들이 잘해줘도 가슴 한 구석이 텅빈 것처럼 허전하고 한국이 그리운 건 사실이다. 호르몬 때문인지 종종 새벽에 깨서 유미의 <별>을 들으면서 밖에서 나무가 흔들리는 걸 보면서 우리동네를 떠올리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그래도 전보다 영국에서 생활이 편해지고, 살아볼만 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개인을 존중해주는 문화, 다양한 사람들, 그만큼 동반되는 여러가지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런던은 참 멋진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살아볼 수 있게 된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다음 달엔 꼭 일을 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은 더 성장한 모습을 꿈꿔본다. 뭐- 마니의 말 대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도 나쁘지 않다. 그래도 내 가능성을 더 깨워보고 싶다. 영영 못닿을 것 만 같던 꿈을 이루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내가 못할게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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