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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4년 9월 열 두 번째 일기 (09.27~09.30)_ 돌아가야 할까요?

by 킹쓔 2024.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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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금 [워홀+60]_ 점점 금이 가고 있습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느적느적 일하러 온 사람, 그게 바로 저입니다. 새벽형 인간이라 7시만 되면 눈이 번쩍 떠졌는데 요즘은 근무가 피곤해서 인지 8시가 넘어서 기상하는군요.

점심은 육개장

 점심 근무를 마치고 휴대폰 요금 문제로 파히즈네 EE 방문. 근데 또 아직 요금 남았다고 월요일날 다시 오라네. 대체 이게 몇 번째 방문이냐고…한국에선 전화 한 통이면 되는데, 참나.

한국에 있을 때 부터 화장품 쟁이는 버릇, 여기서도 여전히 못 고쳤구요. 휴지랑 샴푸 하나 산 걸로 이렇게 죄책감 가져야되나 싶기도 하고.

컬도 없는데 산 컬샴푸

 그렇게 산 샴푸… 봉투값 하나 아끼겠다고 그냥 들고왔다가, 바닥에 떨어뜨려 뚜껑을 깨먹어 버렸다. 에휴. 왜 이러는 것이야 도대체.

 한식당에서 일하는 가장 큰 장점은 한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전 근무가 끝나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속이 좀 든든해졌다. 요즘 나는 밥 한공기를 다 먹는다. 일을 시작하면 늘 배가고프다. 그리고 언제 또 배고픈 생활을 할 지 모르니까.

 오늘은 11시가 다 되어가서야 저녘근무가 끝났다. 한식당 특성상 식기류가 굉장히 무거운데, 돌솥이나 뚝배기를 계속 들고다니다 보니 손가락에 통증이 돋았다. 계속된 업무에 없던 두통도 생겼는데, 그게 자꾸만 작은 실수를 불러왔다.

지하철에서 열린 모터쇼, 구경 잘 하다 갑니다

 퇴근 후에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속적으로 나가는 지하철 요금이 부담스러워서 레일카드 연동 할인을 다시 시도해봤다. 역시나 네트워크 레일카드(30세 이상 전용)는 할인 사항이 없다고 한다. 젠장할. 그래 나이 먹고 온 게 죄다.

  나는 아직도 그놈의 나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힘든 몸보다 이 나이 먹고 식당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더 참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번듯한 직장에서 편하게 일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몸을 쓰는 일을 해야 하고-그것도 워홀러들이 기피하는 한식당에서-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에게 지적 받는 상황이 더 견디기 어려웠을 수 도 있다.

 물론 그 한식당에서조차 서투른 모습은 더 내 자신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장시간 근무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것도 못 버티면 어떡하냐며 나를 다 그쳐보지만, 유리멘탈인 내 마음은 점점 균열이 생기고 있다.


09.28.토 [워홀+61]_ 삐걱대는 마음


 새벽 3시 반.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이 몰려와서 잠에서 깼다. 오리털파카랑 담요를 덮고 자도 가시지 않는 이 한기에 잔뜩 움추러든 몸이 근육통을 더 심화시키는 듯 했다. 때마침 도로에 차들이 요란한 클럽 음악과 함께 크락션을 울려댔다. 하-

 하루라도 조용하고 따뜻한 곳에서 그냥 편히 쉬고 싶다. 포근한 집이 그립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 괜찮은 척 하려 했지만 괜찮지 않다. 다들 잘 버텨내는데 왜 이렇게 요란인걸까 나는. 그렇게 오고 싶어했으면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택한 길인데, 왜 이 정도도 못 견디는 거니. 이렇게 나약한 내가 싫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를 달래야 할 사람도 내 자신 뿐이었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 미룽씨가 준 비상금을 털어 동네 카페로 왔다. 말차 케이크랑 피치우롱티를 시켜서 테이블에 앉았는데, 다들 시끌벅적 재미나 보였다. 나만 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주 세상 고민 걱정 없이 신나고 행복해보이는 그네들 사이로 우중충한 내가 쇼윈도에 우두커니 비춰졌다. 아주 세상의 우울함과 슬픔을 혼자서 다 짊어지고 있네. 지지리 궁상이 따로 없다 정말.

잠시 벗어나고 싶은 내 마음을 대변하는 비행기

 엄마에게 계속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전화가 오니 마음이 약해졌다. 새벽 3시가 되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나를 걱정하는 엄마를 보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란 생각이 들었다.

 답답한 속 마음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았지만 도무지 나아지는 것 없었다. 오히려 내 힘듦만 전가한 기분이라 미안함만 커졌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해결해야 되는 건 나인데, 왜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나 생각이 들었다. 

 위약금 문제로 사갈에게 플랫 계약에 대해 상담을 받았다. 만약 내가 집을 빼려면 세입자를 구해야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단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보증금이고 뭐고 그냥 신경끄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도 곁을 지켜주려는 녀석 덕에 마음이 한 결 나아졌다.
 
 밤이 되자 또 다시 추위가 찾아왔다. 그런 나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 엄마는 여러 번 돌아오라는 전화를 걸었다 끊기를 반복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09.29.일 [워홀+62]_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오전에 주희랑 통화를 하고 나서야 내가 원하는 바를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아직은 떠나고 싶지 않음을. 몸이 힘들고 아프니 마음도 약해지니 끈기가 사라지고 판단력이 흐려진 것을. 굳이 내가 서둘러 떠나지 않아도 떠날 상황이 곧 올 수도 있다. 

 전기 매트가 생겼다. 성언니가 비싼 건 아니지만 보내주고 싶다고, 이거 받고 힘내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확실히 방이 따뜻하니 몸이 한결 나아졌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히터가 고장 났다고 말해도 고쳐주지 않는 부동산을 기다리기보다 진즉 이런 걸 살걸 그랬네.

 도미노피자가 반값 세일을 해서 이거나 사 먹어 볼까 했다. 어제 고맙기도 해서 사갈에게 저녘에 피자 먹을 건데 메뉴 고르라니까 밖에서 나가서 먹잔다. 그런데 비싼 레스토랑이라 인당 20파운드가 넘을텐데 괜찮겠냔다. 엥? 나는 너가 저녘 혼자 먹는 거 안 좋아한다고 해서 기다린 건데... 그리고 피자에 소고기 들어있다고 나가서 먹자고 제안한 건 본인인데 그럼 너가 사야하는 거 아닌가? 내가 어제 힘들다고 사정 얘기도 했는데, 전혀 고려가 없는 것 같아서 서운했다.

 

Tayyabs · 83-89 Fieldgate St, London E1 1JU 영국

★★★★☆ · 펀자비 전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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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20파운드가 그리 큰 돈은 아닌데, 당장 월세 내고 쩔렁거리는 내 주머니 사정엔 꽤 큰 돈이었다. 그리고 자기 문화권에서는 여자가 계산하는 일이 없다던 애가 이리 말할 정도면 얘도 꽤 사정이 안 좋나 보다 싶었다. 다음 주 개강하면 일을 못할 것 같다고, 생활비 걱정을 하던 게 생각이 났다. 그동안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오늘은 내가 사려고 한꺼번에 계산을 했다. 짜잘한 금액일 때부터 나눠서 계산하자고 우기던 과거의 나야... 왜 그랬니 그냥 좀 얻어먹으면 뭐가 덧난다고.

 

 계산대에서 실갱이를 하고 싶지 않아서 화장실 가는 길에 미리 계산을 했다. 사갈은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해놓고 왜 계산했냐고 따졌다. 돈을 받으라느니 바우처라도 받으라느니 실갱이를 하는 과정에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내가 이 와중에 본인 자존심까지 세워줘야하나. 나도 그냥 돈 없는 거 모르냐고 네가 제안했으니 이번엔 사달라고 할 걸.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09.30.월 [워홀+63]_ 바람 결에도 흔들리는 갈대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은 '정말 출근하기 싫다' 였다. 주말 내내 기분이 좀 나아졌나 싶었지만 일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벌써 한국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울면서 갔다. 그리고 가서 아주 줄줄이 소세지마냥 실수를 남발했다. 사장님과 단 둘이 근무하니 더 긴장된 탓이었을까? 바지끈은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고, 주방에 전달해야할 주문표를 잃어버리고, 메뉴를 누락하기도 했다.

 

 큰 꾸중을 하지 않는 사장님의 한숨 한 번이 내 가슴을 바짝 조여왔다. 툭하면 소리를 지른다던 주방 이모님도 그럴 수 있다며 넘어가시는데 더 마음이 불편했다. 자존심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정말이지 이것도 못하냐 나는...점심 한 타임만 근무했는데도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갔다.

 일이 끝나고는 휴대폰 통신 계약을 연장하러 갔다. 현재 사용 중인 4G 요금제를 5G로 변경하려면, 1년치 계약을 해야하는데, 우리나라랑은 달리 꼭 매장을 방문해야 한단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 판국에 무슨 통신비 타령이냐 싶으면서도, 당장 인터넷이 안돼서 불편함을 겪게 되니 다른 선택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력서도 지금 사용 중인 번호를 이용 중이라, 이걸 잃고 싶지 않았기도 하고. 게다가 지난 번 요금제를 사용하면서 받은 바우처도 있지 않나. 

 통신사로 나온 김에 주변에 코벤트가든을 둘러보았다. 다리는 아프지만 교통비를 쓴 만큼 뽕은 뽑고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상점을 구경하고 거리의 악단을 봤다. 쇼윈도 속 화려한 상품들을 구입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구경하는 데는 돈은 들지 않으니까. 

 

코번트 가든 · 영국 런던

영국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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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엔 말 못하고 걷지 못하는 <인어공주>가 된 기분이었다면, 요즘은 <성냥팔이 소녀>가 된 기분이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 내버려졌지만, 화려한 쇼윈도를 보고 행복한 미래를 상상을 해보고는 하니까. 지나치게 감상적인가.

 

 저녘은 오븐에 닭과 토마토, 치즈, 버섯을 구워 먹었다. 얼그래이티에 절인 복숭아조림에 마스카포네 치즈를 크래커에 올려 먹고 나니 잔뜩 배가 불렀다. 비어가는 냉장고를 보며 이제 이런 날들도 얼마 안 남았구나 싶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사갈에게 연락이 왔다. 파힐이 없는 동안은 그의 끼니를 체크하곤 하는데, 저녘 어떻게 하냐니까 아마 냉장고에 먹을 게 있어서 그걸로 해결하겠단다. 지난 번에 괜찮다고 말해 놓고 뒷말을 하던 게 떠올랐다. 애매하게 괜찮다고 해놓고 사실 혼자 먹는 거 싫은데, 확실한 저녘 약속을 잡았다가 어기면 네가 또 싫어하지 않겠냐며, 그래서 그렇게 대답한 거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이번에도 그런 거냐고 확인 차 물으니, 그럼 어제처럼 또 화장실 간다고 거짓말하고 계산할 거냐는 그의 장난에 조금 짜증이 났다. 퇴근한 사갈이 찾아와 자기가 플랫 매니저 파르토에게 네 히터를 손 봐달라고 했단다. 며칠 전 히터를 봐달라던 요청에 그룹톡에 말하라고 할일을 미루던 그는 그제서야 내 방에 한 번 가보겠다고 했단다. 이제 와서요? 아유 감사해라. 

 

 냉담한 내 반응에 혹시 뭐가 문제냐고 묻는 그에게 애써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럼 이번 주 일요일날 저녘 먹는 거 어떻냐고 말에 또 짜증이 울컥했다. 아무래도 한번은 내 심정을 집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저녘이란 거에 대해 우리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했더니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해서 자야 할 것 같단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는 그. 난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면서 왜 사과를 해. 이 녀석이랑 같이 있으면 꼭 내가 잘 삐지고 작은 것에 화내는 그런 속 좁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내겐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그에겐 아닐 때가 많고, 그걸 구태여 설명하는 과정에서 진이 빠진다.

 

 그리고 오늘처럼 설명할 기회마저 차단 당했을 땐 더더욱 화가 나고. 그에겐 나와의 대화가 어떤 잔소리처럼 느껴진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그에게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기대를 한 걸까. 

 

 그냥 친구인 이런 관계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남자친구를 사귀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더 많은 애정을 쏟고, 더 많은 실망을 하고, 더 많은 감정을 소모하고. 그럼에도 관계에 대해 노력하는 것. 그 깊은 관계에서도 상처 받을 것에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를 내는 것. 

 

 한국이었어도 이랬을까 싶다. 이리 작은 것에도 흥분하는 걸 보면 아직 나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잠깐의 근무와 이 정도의 실갱이에도 지쳐서 일찍 잠을 청하는 걸 보면 나는 너무 약해 빠진 사람 같다.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 남고 싶다. 그럼 여기서 잘 버틸 각오는 잘 돼있는가? 그건 또 모르겠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갈대 같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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