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8.월 [워홀+111]_ 언제쯤 울지 않게 될까
이제 혼자서 오픈 근무도 문제 없지롱! 그래도 락스는 아직 힘들다. 찬물로 바꿨는데도 청소할 때 마다 목 아픈 건 여전하다.
근무가 끝나고 사장님과 커피타임을 가졌다. 다행히 권고 사직은 아니었다 깔깔. 그냥 근무 한 지 두 달 정도 되면 커피 한 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사장님만의 면담 방식이었다. 그래서 불편한 부분들도 얘기하고 조율할 부분에 대해선 더 대화를 나눴다.
영국에서 자란 분이라 그런가 확실히 내가 아는 한국사장님들과는 좀 다른 분 같다. 과한 감정 표현은 자제하고 점잖게 행동하시되, 명확하게 표현하는. 그래서 사실 말만 한인잡이지, 직접 느끼는 세계는 한국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할까?
아무튼 사장님은 <즐기며 일하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그러고 싶다 나도 정말. 슈바님이랑 일하면서 잔뜩 긴장하다보니 더 실수하고 틀리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뭐 그것 또한 내 능력이니 할 말 없지 뭐.
퇴근길에는 알디랑 막스앤스펜서에서 장을 봤다. 덕분에 잔뜩 손에 뭘 들고 만원 버스를 탔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영어학원 홍보전화인가 싶어서 고민하다 받았는데 어제 지원했던 베이커리였다. 그렇게 갑작스런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근데 전화면접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잘 봤다. 사실 영어 인터뷰 경험이 많지 않아서 긴장했는데,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원하는 근무시간이나 장소, 비자, 현재 직업, 연휴 계획 등에 대해 질문했고 크게 어려운 질문은 없었다. 아-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냐는 얘기는 좀 대답하기 어려웠다.
왜냐면 내가 이 회사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하는 거 없이 돈 많이 번다'고 들은 거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근무 시간대가 너무 극적이지 않고, 편하게 일하기 좋다고 추천 받아서 지원했는데... 여기서 뭘 사 먹어 본 적도 없고...마냥 꿀 빨러 왔다고 말할 순 없어서 베이커리 문화를 체험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되어 지원했다고 주절댔다. 하지만 일 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23킬로짜리를 계속 드는 일이 있는데 가능햐나고 묻는 걸 보면 그렇게 쉽지 많은 않을 것 같다.
요즘 느끼는 건데, 여기서 인맥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두 달 동안 여러 군데에 지원했을 땐 한 번도 오지 않던 면접 전화가. 세르지오 말 한 방에 이루어지다니. 그것도 지원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 (프렛이나 네로의 경우,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는 데도 한 달이 걸렸다.)
유럽 사회에서 괜히 사교 모임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생각해보면 한국과 영국은 <프라이버시를 대하는 태도>가 정말 상반된 것 같다. 개인 간의 벽이 비교적 낮고, 깊은 관계를 선호하는 한국이라면- 그래서 오지랖이나 각종 부작용도 있지만- , 여기는 개인 간의 벽이 뚜렷하고-대신 그만큼 개개인을 존중해주며-얕지만 넓은 관계를 선호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오늘은 사장님이랑 얘기도 나름 잘 되고, 면접까지 잘 봐서 기분이 좋아야 했다. 그런데 뿌듯하거나 행복한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문득 이제는 울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제법 담담해졌구나. 어떤 읻들에도 전처럼 눈물이 날 정도로 서러움이나 외로움의 동요를 느끼진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착각이었지만.
유튜브에서 우연히 죽은 딸을 AI로 만나게 해주는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참아왔던 눈물의 둑이 터졌다. 영상 속 아이의 목소리가 연이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보고 싶은 연이. 잘 있을까.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워홀 1-2개월 차 만큼 애탈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실 맘 속으론 줄곧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계속 주변에서 좋지 않은 얘기를 듣게 된다. 카페 공고 하나에 5천명의 지원자가 몰렸다는 얘기부터 5개월째 어떤 일 자리도 구하지 못한 워홀러나, 석사까지 졸업했는데도 구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지금 같은 시간이 장기화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
12월이면 공석이 생긴다던 머라이카에게도 연락이 없다. 영국에서 회사를 잡아보고 싶던 내 꿈은 정말 환상이었을까. 나는 과연 이 곳에서 앞으로 살아갈 양분을 기르고 있는걸까, 아니면 허상에 빠져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걸까 이번 달 집세는 잘 낼 수 있으려나.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언제쯤 나는 울지 않으려나. 얼마나 단단해져야 불안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까?
저녘엔 조이가 보낸 안경남이 와서 전구를 갈아줬다. 내 방문을 열자마자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다. 방에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좋은 냄새가 난다는데- 향수도 안 쓰는 나한테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걸까? 바디로션인가?
아무튼 등이 나가있는 동안 어둠에 익숙해져버린 탓인지, 새로운 조명은 눈이 아플 정도로 밝았다. 지하에 살던 사람이 바깥 세상에 나왔을 때 해를 잘 보지 못하는 것처럼, 깜깜함에 익숙해져버린 사람이 밝은 빛을 만난다면- 그는 기쁨에 환호를 지를까 아니면 두려울까. 눈이 시릴 정도로 광명이 찾아든다면, 나는 지금의 이 어두움을 그리워 할 수 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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