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3.일 [워홀+236]- 드디어 노팅힐
노팅힐. 영화 노팅힐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자 런던의 대표적인 부촌. 왠만한 관광지는 다 가봤지만, 노팅힐만큼은 못 갔다. 날이 풀리면 가야지- 시간이 나면 가야지- 차일 피일 미루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무작정 나왔다.
오후가 다 돼서야 도착한 노팅힐은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었다. 북서쪽이라 멀게만 느껴졌는데 막상 책을 보면서 오다보니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노팅힐 · 영국 런던
영국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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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벨로마켓은 골동품을 주로 파는 곳이었다. 오래된 LP판부터 앤티크 커틀러리, 인테리어 용품들을 구경하다보니 마음에 생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포토벨로 로드 마켓 · 영국 W11 1LJ London, 런던
★★★★★ ·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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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팅힐의 배경왼 노팅힐서점도 들렀다. 휴그랜트가 튀어나올 것 같은 클래식한 서점보다는, 그냥 예쁘고 팬시한 일반 서점 느낌이었다. 영국에 와서 한번도 에코백을 산 적이 없었는데, 여기에선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가방을 사니 사은품이라며 달력을 주었다. 이미 올해는 3월까지 왔는데, 달력이 제법 예뻐서 맘에 들었다.
더 노팅힐 북샵 · 13 Blenheim Cres, London W11 2EE 영국
★★★★★ ·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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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녘은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요즘 식비를 아껴야했기도 했고, 거의 나 혼자서 외식을 할 일이 많이 없었다. 비도 오고 날도 추워서 포(pho)가 먹고 싶었다. 근처에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을 갔는데 , 가격이 싼 건 아니지만 꽤 괜찮았다.
저녘엔 오랜만에 라피가 왔다. 엊그제도 봤는데 집에 놀러온 건 한 일주일 만이라서 마음이 설레였다. 고작 그 일주일인데도 이것 저것 준비를 하며 그를 기다렸다.
03.24.월 [워홀+237]_그래서 무엇을 했나요
오후엔 장을 보러 나왔다. 라피랑 같이 있으면서 단점은 너무 늘어진다는 점이다. 하루 종일 누워서 시간을 보내다 저녘을 위해 마트에 갔다. 가는 길에 꽃이 보이길래 공원에 들어가서 잠시 산책을 했다.적절한 꽃놀이도 없이 이번 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아쉬움도 있었고.
공원에 앉아서 우린 대화를 했다. 때로는 장미꽃처럼 진했고, 때로는 벚꽃과 목련처럼 은은했다.
"라피,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큰 게 아니야. 비싼 레스토랑이나 좋은 호텔 같은 걸 바라지 않아. 그냥 봄이면 이렇게 꽃놀이가고, 여름이면 피크닉하고, 가을이면 단풍구경가고, 겨울이면 눈을 같이 맞고. 그렇게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소박하게만 여기던 그것들이 사실은 소박하지 않은 것들임을. 내 비자는 곧 만료된다. 1년 반. 어쩌면 여기에서의 삶이 시한부처럼 느껴졌다. 벌써 여기 온지도 거의 1년 반이 다 되어간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 곧 이것도 끝나겠지.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났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보며 라피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곧 떠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하다고 했다. 그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울기만하냐고 했다. 그 말에 발끈한 나는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그래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오늘 너가 비자를 얻기위해 한 게 뭐냐고.
맞다. 가끔은 라피의 이런 날 것의 말이 송곳처럼 찌른다. 그리고 곧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실 비자를 얻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노력한 게 무엇인가. 입국 초기 취업과 정착을 해결하겠다는 당찬 포부는 사라진 채, 하루 하루 근근히 먹고 살기 바쁜 사람이 되었다. 막연하게 여기서 열심히 하다보면 뭔가 이루어질거라고 믿으며.
사실 그건 정말 뭉뚱그려진 희망이다. 방향도 없이 달리기만 하면 된다고 믿으며.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라고 나중에 말해도 현실은 냉혹함을 알면서.
그래서 한동안 그렇게 초조했었나보다. 늘 온 정성을 쏟으면서도 늘 불안했던 이유는 그거였다. 제대로된 목표도 없이 달리고 있었으니까. 내 최선은 한정되있다. 그 에너지는 효율적으로 쓰여야 했다. 우선적인 일에 먼저 써야한다.
꼭 그의 곁에 있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이 곳에 온 목적을 나는 어느샌가 잊고 있었다. 아니 사실 보지 않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현실의 벽이 가혹함을 알기에. 자꾸만 더 상처받고 좌절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에 조금은 모른척 했다. 그냥 어련히 일이 잘 풀리겠지 하면서. 그런 태도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알면서.
03.25.화 [워홀+238]_ 맛있는 하루
아침엔 팬케이크를, 저녘엔 마라탕면을 해먹었다. 오랜만에 마라탕면을 먹으니 한국 생각도 나고 좋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라피와 작은 말다툼이 있었지만.
문제는 아죤이었다. 그는 자꾸만 만나자고 전화를 하며 라피를 괴롭혔다. 그 이유는 말할 필요 없이 나 일테고. 그런 상황에 지친 그와 약간의 언쟁이 있었고, 조금은 내 탓인가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그냥 여행경비를 보냈다.
물론 그가 과도하게 청구한 숙박비는 빼고. 솔직히 마지막날 공항픽업비도 안내고싶었는데-심지어 내가 이용하지도 않았지만 미리 결제된 부분이라며 그는 청구를 했다- 그건 그냥 예의상냈다. 그리고 그 두 커플을 차단했다. 더 이상 이 문제에 엮이고 싶지 않아서.
03.26.수 [워홀+239]_피곤하다 피곤해
그놈의 새끼들은 돈을 줘도 XX, 안줘도 XX였다. 이제는 내가 안 보낸 25파운드를 빌미로 라피를 더 못 살게 굴기 시작했다. 헐벗고 다녔던 네 여친과 어쩌구 저쩌구하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놈의 명예를 실추시켰단 타령도 계속하면서-목요일까지 잔금(숙박료)를 보내지 않으면 상상 이상의 방법을 동원해서 복수하겠단 협박과 함께.
속상했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기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의도로 노력해서 참석한건데. 그런 호의가 이런 사태를 불러일으키다니. 내가 너무 순진했나 싶었다.
난 데없는 명예훼손 논란이며, 이브닝 파티(거의 파자마 파티)에서 점푸슈트 좀 입었다고 값싼 싸구려 여자 취급까지 받고. 물론 가슴이 살짝 파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나름 런던에서 평범한 느낌인데. 위에 로브도 위에 걸쳤는 걸.
그리고 명예실추는 내가 시켰나? 사람 초대 해놓고, 돈 뜯어내고, 웨이트리스 직업 운운하면서 사람 무시한 본인들이 자초한 일이지. 생각해보면 내가 숨만 쉬어도 별로라고 했었을 사람들이다.
그 커플은 나를 미성숙하고 배워먹지 못한 사람이라며 온갖 지적을 해댔지만, 나는 그 반대라고 여긴다. 진짜 성숙하고 배운 사람이라면, 문화를 잘 모르는 외국인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을테니까. 아니 모르면 알려줄 수 있잖아. 그리고 너네 유럽 살던 애들이잖아... 여기 무슬림 커뮤니티 아니고...심지어 같은 문화권인 사람도 괜찮았다는데 왜.
사실 괜찮은 척 하려해도 안 괜찮았다. 뭔가 내 탓인가 자책을 하게됬다. 게다가 가만두지 않겠단 그의 말에 온갖 상상을 더하며 걱정이 시작됬다. 영국생활 6년 차 그와 6개월 따리 내가 이 도시에서 갖는 지위는 상당히 다를테니까. 한국이라면 별 같잖은 것들의 일로 털어넘겼을텐데, 피곤했다.
정서적 허기짐때문인지 배가 고파서 인근 식당에서 밥을 사 먹었다. 나쁘진 않았는데 맛은 그냥 그랬다.
저녘엔 사장님이 간식으로 스시를 사오셨다. 이모님께서 배추김치도 챙겨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계속 비싸서 못샀던 김치였는데.
아침부터 작것들한테 털려서 피곤했는데, 일을 하면서 좀 위로를 받았다. 역시 말 통하는 사람들이 최고다. 외국 나가면 한국사람 조심하라지만 내 주변엔 한국 사람들은 다 좋았다. 무슨 일 이든 내 일 처럼 성실하게 했고, 곤란한 처지에 처한 남을 봐도 내 문제 처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도와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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