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5.토 [워홀+200]_지지고 볶고 울고 웃고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국 살이 200일을 맞이해서 조금 특별한 하루를 보내보려고 했습니다- 만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지지고 볶은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시작은 아침부터 였다. 밖에 나가자고 조르는 밖순이 나와 어제 늦게 자서 좀 더 자야 한다는 집돌이가 작게 푸닥거리를 했다. 벼르고 벼르던 노팅힐은 못 갔지만 대신에 코벤트가든에 가기로 결정.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 왔지만 몇 시간만에 금방 해가 져버리는 영국을 또 경험했다.
코번트 가든 · 영국 런던
영국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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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 영국살이 200일 기념 코벤트가든 나들이 코스는 부츠-러쉬,-레토였다. 정작 목적지였던 코벤트가든은 들어가보지도 못했지만. 깔깔. 우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부츠를 먼저 방문했다.
부츠 코벤트가든점은 럭셔리브랜드부터 합리적인 브랜드까지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어서 좋다. 매장도 쾌적하고 크고 샘플도 많고. 다른 부츠는 샘플이 거의 없어서 종종 당황스럽다. 전 화장품 천국 올리브영에서 온 여자거든요...
근데 라피 이놈 학생증 맨날 안 들고 다녀. 나 부츠 학생 할인 받아야하는데 껄껄껄. 보자마자 딱 고른 립이 완전 핫한 립이었다. 인터넷에서 연관검색어로 바로 뜨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마에스트로 새틴 10. 약 1시간 정도 넉넉하게 아이쇼핑을 한 후 러쉬로 이동했다.
Boots · 107, 115 Long Acre, London WC2E 9NT 영국
★★★★☆ · 미용용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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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sh Spa Covent Garden · 12-14 Long Acre, London WC2E9LP 영국
★★★★★ · 화장품 판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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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가자마자 메이크업부터 쌈뽕하게 했다. 무료 메이크업 코너가 있길래 옳다구나 하고 받아봤지. 결과는? 오렌지 아이메이크업으로 드랙퀸 변신! 언니가 내 짧은 속눈썹 구해준다고 마스카라도 엄청 열심히 해줬는데 후후...어쩌겟어요 내 얼굴이 죄죠 깔깔.
그리고 바쓰만 만들기 체험도 했습니다. 5파운드(한화 약 10,000원)내고 레터박스 배쓰밤을 만들었는데, 체감상 5분도 안되서 끝난 것 같지만 재밌었다. 히히 욕조도 없어서 할까말까 고민했는데, 오늘은 200일이니까 후후. 그리고 여행가서 쓸 수도 있잖아? 깔깔.
마지막으로 들른 곳으 대망의 레토. 영국인 라이언도 한국인 동료도 입을 모아 칭찬하던 바로 그 케이크 집. 확실히 비주얼부터 끝판 나더라. 대부분 영국 케이크집들이 막 맛있다는 생각은 안들었는데, 여긴 진짜 맛있었다. 대신 그만큼 가격도 비쌌지만. (보통 한 조각에 9파운드. 우리나라 돈으로 약 18,000원 정도)
L'ETO Covent Garden · 138 Long Acre, London WC2E 9AA 영국
★★★★★ · 음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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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라피랑 첫 싸움이 시작됬다. 처음으로 정말 핏대 세우면서 싸웠다 후후. 그 이유는 버스 때문이었는데. 라피는 걸어서 40분 거리니 걸어가자였고, 나는 비도 오고 날씨도 추우니 버스를 타고가자고 했다. 그는 버스를 타도 15분 정도를 걸어야 하는데 왜 그러고 싶냐고 했고, 나는 더 둘러보지도 못할 정도로 춥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냐고 반문했다.
그는 돈이 없었다. 버스비 2파운드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래서 잔뜩 쪼그라든 채로 고슴도치마냥 성질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돈이 없는 건 괜찮았다. 어차피 이 관계에 큰 기대없이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쓸떼 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는 건 참기 힘들었다.
이 추위에, 이 귀한 케이크를 들고서 걷기가 싫었다. 그런 내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수는 없는 건가 화가 났다. 나는 우리집 가장이었다. 이 몸뚱이를 잘 지켜야 생계도 연명할 수 있다. 무릎 수술까지 했던 사람이라 다리 통증에 더 민감했는데- 그에겐 이런 내 입장을 돌봐줄 여력이 없었나보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내가 소리를 질렀다. 알량한 네 자존심때문에 내가 얼마나 더 참아야하냐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이 추위에 이 피곤함에 내가 걸어가다 아프면 니가 책임질 거냐고- (사실 '알량한'이라는 표현은 못했다. 영어로 '알량한'이 뭘까? slight?)
그제서야 버스를 타겠다고 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저 끝까지 상해있었다. 아무말도 말고 그냥 따라오라는 내 말에 잠자코 따라오던 그를 보면서도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성질 같아서는 진짜 그 자리에서 집에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개떡같은 상황에서도 성질머리를 죽일 줄 아는 거 보니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싶었다.
어쨋든 집으로 잘 와서 축하파티를 했다. 집에 오니 추위에 얼어버린 몸이 살짝 현기증을 느꼈고, 녹아버린 케이크를 보니 한번 더 빡쳐서 한번 더 성질부렸지만 깔깔. 이것이 리얼 연애로구만...그래도 앞으로는 말 잘듣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저녘을 같이 먹었다 후후. 그래 임마- 누나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떨어진다구.
그렇다. 정말 아침부터 지지고 볶고 울고 웃는 다사다난한 200일을 보냈다. 사실 이때 쯤 되면 뭐라도 많이 해냈을 줄 알았는데, 별 게 없다. 여전히 벌이는 불안정하고, 늘 생활비랑 집세를 걱정하느라 전전 긍긍하고. 한 거 없이 시간만 흘러보낸 것 같다 허탈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확실히 멘탈은 세진 것 같다. 아주 fragile했던 유리멘탈이 내가 지금은 꽤 단단해졌다는 거. 이젠 근무일 수 가 적어도 쫄지 않고, 돈이 없어도 또 없나보다 한다. 넉넉치 않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태도를 유지 중이고, 작게나마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려는 노력한다. 불쾌하거나 속상한 상황이 생겨도 이 또한 경험이려니 하고 넘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니까- 지금이 제법 나쁘지 않은 가장 큰 성과를 내고 있는 시간이라고 하고 싶다.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돈이나 직장, 명예보다 -어쩌면- 강철멘탈이나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 뭐 그런게 인생에서 더 소중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잖아?
꽤 가난하고 팍팍한 삶이지만, 제법 풍요롭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런던 살이. 게스트하우스 침대에서 훌쩍이던 꼬맹이는 반년 새에 엔간한 일은 잘 웃어넘기는 어른이 되었다. 그건 기쁠 때나 속상할 때나 곁을 지켜준 사람들 덕이겠지. 이 자리를 빌어 그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잘 버틸 수 있었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지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당신들도 부디 안녕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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