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5년 2월 네 번째 일기 (02.12~02.14)_소소한 런던에서의 일상

킹쓔 2025. 2. 1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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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2.수 [워홀+197]_ 제법 익숙해져가는 런던

 
 새벽같이 일어나서 운동화를 빨았다. 새 집으로 이사 오고 나니 여러 가지로 편한 생활을 누리게 됐는데, 그 중 하나가 빨래다. 세탁기도 두 개고, 화장실도 여유롭게 써서 각종 손 빨래도 쌉가능이다. 

하지만 빨아도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운동화 / 망했다 비번 까먹음

 은행 비밀번호를 5회 이상 틀려버렸다. 이거 복구하려면 영사관 방문해야 된다는데, 망했지 뭐. 왠일인지 본인인증도 안 되서 참 난감한 상황이다. 나 정말로 외국에 있구나.

출근길에 본 예쁜 일러스트

  그렇다. 나는 런던에 있다. 이따금씩 그래피티로 가득한 길을 걸을 때 마다 내가 있는 곳이 런던임을 실감하게 된다. 많은 아티스트들의 성지, 파리와는 다른 느낌으로 예술의 혼이 흐르는 이 도시. 가난한 이마저 낭만이란 이름으로 포장해버리는 유럽의 도시.

저 멀리 보이는 세인트 폴 대성당

 

건물마다 보는 재미가 있는 런던 거리

 대부분의 거리가 모던한 건물들로 가득한 서울과 비교해 볼 때, 런던은 제법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도시이다. 그래서 버스를 타는 게 참 좋다. 창 밖으로 여러 건물들을 보다 보면, 여러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 그리고 이젠 제법 이런 풍경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면서, 이 도시에 내가 제법 잘 녹아내린 기분이 든다. 

오랜만에 셀카 한 장

 

역시 블랙벨트방은 다르네

 오늘은 라이언네 촬영을 갔다. 저번에 제임스가 아프고 바쁜 관계로 펑크가 나서 걱정이 됐는데, 그나마 이 친구라도 비빌 구석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타지에서도 제법 인적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고 있는 나. 이런 건 잔뜩 칭찬해 주리라. 잘했어 내 자신.


02.13.목 [워홀+198]_ 누구나 가슴 속에 사표 하나 씩은 있잖아요

 
 한국에서도 그랬다. 종종 울컥 때려치워 버리고 싶은 날이 있었다. 작은 스트레스나 시덥 잖은 실수들에 사로잡혀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되는 그런 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어제부터 연 달은 실수가 있었다. 테이블을 헷갈려 계산을 잘못 받았고, 모자른 돈을 메꿔야 했다. 처음 한 실수 인데, 그 댓가가 제법 매워서 좀 속상했다. 그런데 무슨 일 인지 어제 연달아 또 실수를 했다. 내가 받은 주문인데, 누가 받은 주문이냐는 사장님의 질문에 잘못 대답했다. 원인 모를 포스기의 고장 덕분에 내 잘못은 더 두드러졌다.
 
 연달은 실수를 꾸짖는 사장님의 말에 괜히 울컥했다. 잘못을 했으니 혼나는 게 당연한 건데, 그 과정이 유독 더 견딜 수 없이 느껴지고 내가 한없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요즘 일에 회의감이 느껴지던 터라 더 그 생각이 맴돌았다. 그만둘까?

꽃이 가득한 런던 마트들

 산책 겸 나온 마트에는 꽃들이 가득했다. 기분 전환 삼아 찐한 쵸콜렛이라도 사 먹고 싶은데, 그럴 형편이 못 됬다. 그 때 문자를 받았다. 어제 지원했던 베이비시터 면접이 캔슬 됐다는 연락이었다. 레퍼런스 두 명이 없기 때문에 인터뷰를 진행할 수 없다는 이유와 함께. 
 
 그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뭘 그만두냐. 제대로 된 일자리 없이 일단 그만두고 뭘 어쩔 건데. 그놈의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참자. 직장인의 숙명은 참아야 하는 거야. 누구나 가슴 속에 다 사표 하나 씩 품고 살아가는 거 잖아.


02.14.금 [워홀+199]_ 해피 발렌타인데이

 
 어젯밤에는 제법 괜찮게 하루를 마무리 했다. 말로만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줄 알았던 라피가 왔고, 한국에서 소포도 왔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찝찝하고 짜증 났던 기 하루였지만, 그 둘 덕에 참 기분이 좋았다. 

한국에서 온 반가온 선물

 그리고 아침에는 더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에게서 편지를 받는 건 정말 기분이 좋은 일이다. 바쁜 와중에도 한 자 한 자 마음을 눌러 담아 써준 편지가 참 고맙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마니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논문 마무리 중인데 내 이름을 넣고 싶다고, 이름이 맞는 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논문 맨 끝에 본인의 지식을 위한 긴 여정을 함께해준 많은 사람들에게 thanks to를 적는 중인데, 거기에 내 이름을 넣고 싶다고 했다. 참나 이런 영광이- 대영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그가 생각났다. 매 번 포닥과정이 짜증난다고 투덜대던 그. 결국 잘 해냈구나. 괜히 내가 다 뿌듯하구만. 
 
 점심을 먹다가 에니거와 마주쳤다. 에니거는 우리 플랫에 사는 플랫메이트 중 한 명이다. 우리집 윗층에 사는 영국인 대학생인데, 주로 빵이랑 파스타를 주식으로 먹는다. 요리를 할 때마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 한 입 달라고 하고 싶다. 오늘 발렌타인데인데 뭐 하냐니까, 학교갔다 일하러 간단다. 몰랐는데 그도 웨이터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짜식 대학생인데 알바도 하고 대견스럽구만. 요즘 부쩍 자주 대화하는 우리. 저번에 감자를 나눠주고는 곧 친해진 느낌이다. 물론 그의 억양을 알아듣기 힘들어서 대화의 대부분을 웃음으로 때우곤 하지만.

 밤에는 알죤의 RSVP를 작성했다. 늘 섬에서 소수의 친구들을 초대하는 스몰웨딩을 꿈꿨는데, 그런 결혼식에 가게 되다니. 조금 설렌다. 다음 달이면 좀 날이 따뜻해지려나. 

 저녘근무때는 동료에게 쵸콜렛을 선물로 받았다. 일도 잘하고 사회생활도 잘하는 야무진 그녀. 나보다 어린데 늘 당차고 싹싹한 이라 늘 많이 배운다. 이런 사람을 곁에 둔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네.

 

 그래도 일은 정말 하기 싫었다. 요즘 따라 권태기인지 일이 정말 너무 지겹고 하기 싫다. 작은 실수라도 해서 혼이 날 때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 충동적으로 올라왔다. 

 그런 마음을 눈치라도 챈 건지, 사장님이 일 끝나고 회식을 시켜주셨다. 상사랑 술 자리라는 타이틀은 좀 부담스러웠지만 싹싹한 그녀가 중간에서 잘 하드캐리 해줬다. 역시 우리 복덩이. 전에 스티브가 추천해준 블랙 기네스를 소개해줬는데 다들 좋아해서 좋았다. 그렇게 오랜만의 회식은 즐거웠다. 다만 라피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괜히 신경이 쓰였다. 추웠을텐데, 별 불평 없이 한 시간을 기다려줘서 조금 고마웠다.

 

 쌀쌀맞은 추위에도 우리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걸었다. 근사한 식당에서 먹는 저녁이나 화사한 꽃다발은 없는 하루였지만, 모쪼록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 덕에 풍성한- 해피 발렌타인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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