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5년 2월 두 번째 일기 (02.03~02.04)_ 감기로 응급실 가기

킹쓔 2025. 2. 1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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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월 [워홀+188]_ 영국 응급실에 가다

 

 아침은 과거의 나에게 감사했다. 이 작은 컵라면을 미리 사둔 것에 대해, Bless you, 수진. 진짜 먹을 게 하나도 없었는데 그 나마 예전에 사둔 이 컵라면 덕에 끼니를 연명할 수 있었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야채를 몽땅 부어 그럴듯하게 끓여 먹었다.  

 그래도 뭘 좀 먹고 나니 몸에 기운이 돌았다. 아니 돌지 않는 데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식료품 점으로 가야했다. 당장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굶어 죽는 건 나니까. 외국에서 혼자 아프다는 건 이런 거구나. 온전히 홀로 이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것.

바리바리 장을 본 결과

 사실 근처 한식당에서 파는 뼈다귀 감자탕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월급날이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신용카드로 끼니를 연명 중이었는데, 식당까지 가기엔 양심이 너무 찔렸다. 결국 얼큰한 무언가를 먹는 대신, 토마토 수프랑 레몬이랑 오렌지를 사다가 청을 만들었다. 여기선 과일이나 채소가 비교적 싸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나으려고 노력하는 수 밖에.

돈 없는 워홀러가 감기를 이겨내는 법

 하지만 결국 저녘엔 응급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열은 멎지 않고 치아부터 무릎 관절까지 몸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목은 타 들어가는 것 같고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이러다 쓰러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덜컥 겁이 났다. 체온계 없이도 비정상적으로 열이 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효과가 미미한 감기약 대신 제대로 된 처방이 필요했다. 그 때 시계를 보니 8시였다. 

 

 부츠도 약국도 병원도 대부분이 문을 닫는 시간 때라 어디로 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출혈 현상이 없으니 응급 환자 취급은 못 받을텐데,  내일까지 기다리다간 죽을 것 같았다. 결국 라이언에게 물어 NHS 구급 지원 서비스인 111에 전화를 걸었다. 

영국 응급실 풍경

 상담원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말하는 동안만 5분 이상 걸렸다. 내 이름이 알아듣기 어려운 이름이 아닌데, 상담원은 자꾸 'KIM'을 'KING'으로 알아 들었다. 게다가 컨디션이 안 좋으니 전화번호조차 정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매 번 쓰던 전화번호인데도 그 몇 개의 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통역 서비스를 지원 받아 한국인과 함께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비교적 가벼운 증상이었으니 망정이지, 절단이나 출혈 같은 응급 상황에선 정말 답답하겠다 싶었다. 

킹쓔's 영국워홀 꿀팁: NHS 의료 지원 서비스 111

1) 환자의 이름, 전화번호 말하기
2) 증상 말하기 (통역 서비스 지원 가능)
3) GP 혹은 집 주소나 현재 머무르는 곳 주소 말하기
4) 상담원 안내 따르기 : 화상진료, 가까운 응급실 확인, 야간진료소 확인, GP 예약 등

진료비 무료 / 처방전 약값 유료 

 

 30분이 넘는 통화 끝에야 야간 진료 중인 응급실에 진료를 배정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엔 화상 연결을 해준다고 했는데, 운 좋게 문을 연 곳을 찾은 것이다. 병원에 갈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감사했다. 결국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인 응급 야간진료실로 향했다.

 

 가는 길도 결코 쉽지 않았다. 돈도 없고 체력도 따라주지 않았다. 아까 장을 보는데 돈을 다 써서 차비가 없었다. 다행히 예전에 친구들이 준 현금을 털어 차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기 전에도 타 들어가는 갈증과 혼미한 정신으로 걷는 게 힘겨웠다. 그 많던 인근 편의점이 잘 보이지 않았고, 주변 마트를 찾는 그 몇 분이 몇 백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트에서 물을 사는 것도 일이었다. 자꾸만 눈 앞이 캄캄해져 물이 잘 보이지 않았다. 힘겹게 물을 집어 계산대에 올렸지만,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다 모두 놓쳐버렸다. 그것들이 바닥에서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데도 그 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반 쯤 꺼져 가는 촛불 같은 상태였다.  

 언젠가 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혼자 살면, 아픈 게 제일 무서워요." 그랬다. 정말 아무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었다. 이 조그만 아픔도, 그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과정도, 모두 오롯이 내 몫이구나. 

 

 연가시처럼 물을 연거푸 들이마시고 나서는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아랫도리가 끊어질 정도로 통증이 느껴졌다. 중간에 잠깐 내릴까 고민했지만, 진료시간이 지나버릴까 걱정이돼서 참았다. 목이 아팠다가 아래가 아팠다가, 정말 위 아래 사이좋게 통증이 오는구나. 그렇게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나서야 어렵사리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응급실 뒷문으로 들어가 접수대에서 내 이름을 말했고, 5분 정도 지나자 내 이름이 호명됐다. 

 

 진료하는 데는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병명이 뭐냐는 질문에 일종의 '감염 증상'이라는 대답만 했다. 의사는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아프고, 열이 펄펄 나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데 단순 감염 증상이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그 정도보단 잘 말하겠다. 솔직히 조금 기가 찼다.

 

 그래도 그는 영국인답게 매우 친절했다. 이것 저것 묻는 내 질문에 "저런- 많이 불편하셨겠군요."를 연발했다. 물론 영혼은 빠져있는 느낌이었지만. 항생제를 처방해줄 테니 경과를 지켜보자며, 확인서를 끊어줄테니 필요하면 직장에 제출하란다. 고마워라. 가까운 약국에 처방전을 보내 놓을테니 문 닫기 전에 서두르란다.

진료 확인서. 프린터 안되남요...

 

약 타는 것도 일이다

 가깝다던 그 약국은 버스 타고 병원에서 30분 거리였다. 약사에게 이름을 말하니 처방된 항생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버스를 두 번 갈아 타고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길다 길어. 차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는 그 시간이 참 길게만 느껴졌다. 별 거 아닌 그 움직임들이 너무 피곤하고 고통스러웠다.

 

 독감도 감기도 아니고 단순 감염 증상이 이렇게 까지 괴로운 걸까. 아니면 내가 영어를 잘못 알아 들은 걸까. 한국에서도 감기에 잘 걸리지 않던 튼튼이가 왜 이렇게 여기선 너무 골골대는 걸까. 이것보다 더 심하게 아플 땐 어떻게 해야할까.


02.04.화 [워홀+189]_아플 땐 누가 옆에 있어야 해

 

 아마존에서 시킨 체온계는 오지 않았다. 익일 특급으로 시켜서 배송료도 추가로 결제했는데, 도착했다는 그 택배는 전혀보이지 않았다. 이거 기다리다가 대문이 잠겼는데, 열쇠까지 없어서 밖에서 한참을 떨었다. Oh Dear, 체온계 하나 받는 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던가요.   

 목이 너무 아파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근데 너무 커서 냉동실에 안 들어갔다... 휴 냉동실이 조금만 컸으면 좋겠다. 결국 또 통에다 다 퍼내고 난리를 쳤다.

 

 웃긴 건 그 와중에도 아픈 내 몸 걱정보다, 내일 출근이 더 걱정되었다. 이번 주에는 꼭 일을 많이 해야 되는데, 이렇게 아프면 일 못하는데. 그럼 이번 달 방 값은 어쩌지. 한국에선 전혀 고민해본 적 없던 일들이 여기에선 차갑게 와 닿는 현실이구나. 

 

 라이언에게 들은 바로는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고 했다. 그도 나와 비슷한 증상으로 며칠을 앓았고,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고 했다. 며칠 전 식당에서 알리가 감기로 쉰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 감기 맞다고 이 의사 선생님아...

기운 차리고 밥 까지 먹으러 감

 저녁엔 라피를 불렀다. 아픈 건 스스로 혼자 이겨내야 하는 건 알지만, 몸이 힘드니 마음이 약해졌고, 누군가 곁에 두고 싶었다. 그나마 부를 수 있는 게 걔 였고.

 

 신기하게도 라피가 오고 나서야 좀 기운을 차렸다. 뭐 그제서야 항생제가 작용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곁을 지켜준다고 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나보다. 남에게 부탁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부르기 전엔 한참을 고민했는데, 도움을 요청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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