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9.월 [워홀+314]_ 라피도 외로워요
얼마 전부터 한국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그게 라피에게도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그도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다며 투덜댔다. 이드(우리나라로 치면 추석 같은 명절)라 온 가족들이 모여 전화를 했는데, 본인만 이 곳에 홀로 떨어져 있다고.
사람들은 런던에 있는 자기를 천국에 있다며 부러워하지만, 자기는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온전히 홀로 남겨진 이곳에서 본인도 외로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왠지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갔다. 가끔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외국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며 부러워했다. 팔자 좋아 보인다는 볼 멘 소리를 하면서. 이 곳 에서의 삶도 '하루 하루 생존의 연속'이라는 사실에는 무관심한 채.
울적해하는 라피를 데리고 그럼 내가 일일 가족 해주겠다고, 같이 명절(이드) 음식을 같이 만들어 먹자고 했다. 깔깔. 하지만 내가 뭘 어떻게 만들겠어... 그래서 그가 사온 음식을 그냥 같이 먹었다 호호.
여하튼 그도 내색하지 않지만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친척들의 전화에 신나서 몇 시간을 통화하던 그를 보며,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싶다. 타향 살이가 참 쉽지 않구나.
06.10.화 [워홀+315]_ 나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오랜만에 외부 촬영 나간 날. 짧은 브레이크 동안 근처로 인터뷰를 나갔는데, 맑고 푸른 하늘의 바이브를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멀리 나가지 않은 탓에 시간적으로도 여유로워서 좋았다.
인터뷰가 끝나고는 리버풀 스테이션역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기차역에서 목적지를 향해 이곳 저곳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시간에 쫓겨 잘못된 기차를 타진 않았나.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과연 알맞은 곳인가 같은.
리버풀 스트리트 스테이션 · 영국 EC2M 7PY 런던
★★★★☆ · 버스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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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수 [워홀+316]_ 테이트 모던 서도호 전시
아침부터 랜드로드가 별안간 노크를 해대며, 집 좀 깨끗이 쓰란 잔소리를 했다. 티넌트(세입자)가 몇 명인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했더니, 니가 유일한 레이디니까 좀 더 신경썼으면 좋겠단다. 이 아줌니 뭔소리를 하는거야.
오늘은 휴일. 같이 일하는 동료가 이 날에 맞춰 전시회 티켓을 끊어주었다. 요즘 인터넷에서 핫 한 <서도호> 작가의 전시. 이거 가려고 아침부터 서둘렀지. 빡 센 운동하고 시간 맞춰 라피랑 버스를 탔고, 해당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테이트모던으로 갔다.
테이트 모던 · Bankside, London SE1 9TG 영국
★★★★★ ·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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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방문 했을 땐, 드레스 코드가 엉망이라며 불평하던 김라피씨. 오늘은 셔츠를 입었는데 단추를 여러 개 풀러서 내가 여며라 마라 또 작은 다툼이 있었다. 그래도 지지 않는 패셔니 스타. 깔깔...
고맙게도 서도호 전시회 외에도 다른 전시까지 두 개의 티켓을 받았다. 처음 영국 살 땐,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자주 다닐 줄 알았는데. 이렇게 티켓이 생기지 않으면 은근 잘 안 오게 된다.
전시는 흥미로웠다. 광주 사건, 한옥, 배보다 배꼽이 크다 같은 한국적 표현 등, 확실히 나와 같은 배경을 가진 작가라 그런지 훨씬 작품들을 이해하기 쉬웠다. 한국과 미국, 영국을 오가던 작가의 세계들을 보며 많은 공감과 위로를 받았다.
다른 전시였던 안소니 전시회도 좋았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표현되는 작품들은 굉장히 몽환적이면서 세련된다고 느껴졌다. 아무튼 동료 잘 둔 덕에 전시회 구경 잘 했네. 오랜만에 미술관 나들이 끝.
06.12.목 [워홀+317]_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합니다
요 근래 직장에서 기운 빠진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스벅 모카 프라푸치노를 사주면 좀 나아지려나 싶어 브레이크 때 스벅을 찾아갔다. 구글맵에 검색해보니 회사 근처가 아니라 먼 곳에 떨어져 있길래 30분이나 걸려 갔고, 올 땐 음료가 녹을까봐 버스까지 타고 왔다.
그 과정에서 휴대폰 액정까지 깨먹었다. 버스를 잡으려고 뛰는데 휴대폰이 떨어지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프로텍터만 깨지고 디스플레이에는 손상이 없었다. 더위에 땀은 땀대로 나고, 음료는 한 껏 녹아서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 역 근처 바로 앞에 스벅이 있었다. 하하...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났다. '머리가 안 좋으면 몸이 고생한다'고. 물건도 잘 못 찾고, 길도 잘 못 찾는 주인 덕에 몸이 제대로 고생했구만. 으유으유.
06.13.금 [워홀+318]_ 열정의 탱고
얼마 전 집 근처에서 일일 탱고 클래스 광고를 봤다. 사교 댄스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당장 신청했지 깔깔.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 강습소가 있었다.
6시부터 9시까지 세 시간 수업 한댔는데, 정작 제대로 배운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정말 재밌었다. <리베르탱고>와 <여인의 향기OST>를 통해 탱고의 매력에 이미 빠져있었는데, 수업을 통해 배운 이 춤의 매력은 어마어마 했다.
그냥 같이 추는 춤인 줄만 알았던 탱고는, 파트너와의 교감을 기반으로 온 몸을 사용하는 예술행위였다. 말이나 글이 아닌 몸으로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시간은 굉장히 새롭고도 뜻 깊은 시간이었다. 스텝을 따라 가느라 발 끝만 바라보고 있던 내게 선생님은 몸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느끼라고 권유했다.
리드를 하는 파트너의 역할도 마찬가지였다. 스텝을 제안하고 파트너가 따라올 때 까지 기다리고 그렇게 춤이 이루어지는 식이었다. 턴 마다 상대를 바꿔가면서 춤을 췄는데, 처음에는 낯선사람들과 몸을 부대끼고 움직여야 하는 일이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한 바퀴 돌 수록 나아질거란 누군 가의 말처럼, 곧 긴장이 풀리고 익숙해져서 춤을 즐기기 시작했다.
종종 느끼는 건데, 말이나 행동 외에도 상대방의 성격을 엿 볼 수 있을 때가 있다. 바로 운동을 할 때다. 몸을 쓰는 동작에서도 그 사람의 성격은 그대로 반영된다. 사교댄스에서는 그 사실이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각자 성격에 따라 여유롭고 조용히 리드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힘으로 내 움직임을 컨트롤 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뚜렷한 차이점들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왜 사람들이 춤바람 난다고 하는 지 알 정도로 정말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근무 시간이 일정하다면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는데, 수업 시간이 안 맞아서 아쉬웠다. 언젠간 승혜의 말 대로 스페인에 가서 탱고 한 번 진하게 쳐봐야지 히히히.
06.14.토 [워홀+319]_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어제부터 보고 싶다고 졸라대는 남자친구를 위해 그의 동네로 가는 착한 여자친구는 누구? 바로 나. 점심도 못 먹었을 까봐 햄버거 사주려고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정작 그는 약속시간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일 하러 가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냥 나 먼저 시켜먹었다. 요즘 칼로리를 좀 줄여보려고 번 대신 양상추로 바꿔 먹었다. 운동은 하는데 눈에 띄는 결과 없이 체중이 자꾸 늘어나길래, 식이요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 온 라피가 밀크쉐이크를 사 오는 바람에 그 계획은 제대로 망했다. 네가 좋아하는 밀크 쉐이크 주문했다며 해맑은 모습으로 들고 오는 녀석. 휴...칼로리 폭탄으로 유명한 파이브가이즈 밀크쉐이크에 피넛버터랑 오레오까지 추가 해버리다니. 정말 도움이 안 되는 남자친구다. 근데 또 맛은 있어서 들고 가서 잘 먹었지만, 어쨋든 정말 도움이 안돼.
06.15.일 [워홀+320]_갓생 사는 중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운동하러 갔다. 쉬는 일요일에도 부지런히 움직이는 나. 칭찬한다 칭찬해. 요즘은 자꾸 나를 칭찬해보려고 하는 중이다. 구직 건으로 자꾸만 쭈그러지는 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건 나 자신의 위로와 격려일 테니까.
운동 끝나고 장 보러 갔는 데 이게 왠 걸요. 메니큐어 팝업 진행 중! 안 그래도 네일 한 번 받아보고 싶었는데, 냅다 줄 서서 기다렸다. 난 코리안~ 오픈 전 10분 대기는 일도 아니지. 당당하게 첫 번째로 입장. 노랑 초록 섞어서 네일을 받고, 사진도 찍었다. 성수팝업 돌던 짬바 어디 안갔네. 심지 보고 있나- 당신이 키운 제자가 이만큼 컸습니다.
집 와서는 밥 먹고 미룽씨랑 통화를 했다. 서로 사는 얘기, 이런 저런 고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뚝딱. 낮잠 조금 자고 방 조금 치우니 벌써 저녁이 되버렸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오늘 일찍 퇴근하니까 마중 오면 안되냐고 전화 온 김라피씨. 휴 정말 우리 베이비 챙기러 갑니다.
매 번 밤에만 와서 몰랐는데, 라피네 펍 정원은 일몰이 굉장히 예쁜 곳 이었다. 비록 정원 폐점시간 때문에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있지는 못했지만, 잠깐의 노을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함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라피가 바에 맥주를 가지러 가는 동안, 옆 테이블 아줌마가 요요 같은 걸 하고 있었다. 신기하게 바라보니까 한 번 해보라고 줘서 해봤다.
서투른 내가 답답했는지 옆 테이블 아저씨가 와서 시범을 보여줬는데, 정말 묘기에 가까운 신기술들을 선보였다. 25년 전에 해보고 처음 해보는 거라는데, 확실히 어렸을 때 배운 건 어른이 되서 까지 잊혀지지 않는걸까?
오는 길은 라피네 집에 들를 일이 있어서 기차를 타고 왔다. 라피는 내가 온 게 많이 신났는지 입이 귀까지 찢어져서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매 번 막차 시간에 늦을까봐 혹은 내가 기다리고 있어서 서둘러야 했는데, 오늘은 여유롭게 갈 수 있어서 좋다며. 퇴근 길을 외롭지 않게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짜식- 알면 더 잘해 이것아.
하튼 오늘 하루도 눈 뜨자마자 운동하고 네일하고 장보고 친구랑 통화하고 데이트 하러가고 바쁘게 살았다. 이 정도면 갓생이지. 갓생이 뭐 별거냐. 오늘도 갓생사느라 수고했다 내 자신!
06.16.월 [워홀+321]_ 더운 날에는 그냥 집에 있읍시다.
아침부터 일이 있어서 눈물 바람으로 하루를 시작한 나. 그런 내 기분 전환 시켜준다고 차이나타운에 데려간 라피. 덕분에 최근에 먹고 싶어하던 챠오면을 먹었다. 깔깔.
Sha-xian Delicacies · 7 Gerrard St, London W1D 5PH 영국
★★★★☆ · 중국 음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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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po piccadilly · 10 Glasshouse St, London W1B 5AR 영국
★★★★★ ·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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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t Flagship Store Piccadilly · 14 Shaftesbury Ave, Piccadilly Circus, London W1D 7EA 영국
★★★★☆ · 초콜릿 전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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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나갔다만 하면 싸우는 것 같다. 그는 과로로 인한 피로로, 나는 직장 스트레스로 서로 예민해져있었는데, 이런 저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서로 푸닥거리를 하던 우리. 둘다 서로 한 성깔씩 하는 탓에 턴을 주고 받으며 성질을 부리던 끝에 마지막에는 결국 내가 폭주해버렸다. 휴- 어쩐지 이렇게 더운 날에는 그냥 집에 있을 걸.
상대에게 해서는 안되는 말을 내뱉었고, 바로 후회 했지만 여파는 꽤 컸다. 다행히도, 사태는 잘 수습됬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생각보다 그가 내게 큰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 애써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요즘은 그냥 모든 걸 연습해야하는 시기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연습을. 생계에 문제가 생겨도 휴가를 맞은 것 처럼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초조해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여유, 상대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존중할 줄 아는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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