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2.일 [워홀+327]_ Dynamic Sunday
<웨스트 엔드 라이브(WEST END LIVE> 는 런던에서 놓쳐서는 안 될 쇼 중에 하나 다. 매 년 여름 6-7월이 되면 런던 웨스트 엔드 극단들의 화려한 뮤지컬쇼가 펼쳐진다. 유명 극단들의 트레일러를 무료로 볼 수 있는 축제라 항상 만산인해를 이룬다.
West End Live 2025 - 20 Years of Musical Magic
Celebrate 20 years of West End LIVE with a weekend of outstanding performances from top West End musicals, live and free in Trafalgar Square.
www.westendlive.co.uk
5분 차이로 보고 싶던 <라이온킹> 트레일러는 눈 앞에서 놓쳤다. 피곤해서 못 일어나던 라피 덕에. 내가 그렇게 일찍부터 깨웠는데. 꽤 나 고대하던 쇼를 놓쳐서 김이 팍 샜다. 게다가 지속된 야근으로 몸 상태가 안 좋던 녀석은 계속 짜증을 냈다. 전 석이 스탠딩석이라 발이 아프다고 투덜대는 그를 위해 근처 공원으로 갔다.
트라팔가 광장 · Trafalgar Sq, London WC2N 5DS 영국
★★★★★ · 대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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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도 계속 투덜대던 그. 결국 우리는 또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다. 나는 나 대로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내 입장은 전혀 배려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들었고. 그가 컨디션이 안 좋은데도 같이 와준 건 고마웠지만, 이렇게 계속 피곤해 할 바에는 그냥 쉬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싸운 채로 집에 가던 길. 우연히 쇼윈도에 비춘 나를 발견했다. 헝클어진 머리, 쓰다 만 모자를 걸친 채로 양 손 가득 짐을 든 모습이 힘겨워 보였다. 그런 나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토라져 가버리는 그가 보였다. 아주 가볍게. 그와 좋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준비한 도시락이며 돗자리까지 챙겨 든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혼자 조그만 실소가 터졌다. 요 며칠 반복되고 있는 이런 상황에 회의감이 느껴졌다. 나는 계속 그에게 실망하고 서운함을 토로하고, 그런 그는 나에게 피로감을 느끼고. 이 관계는 서로에게 무슨 의미일까. 달달하던 시절의 우리는 어디 간 걸까. 연애란 건 이런 건가.
세인트 제임시즈 공원 · 영국 SW1A 2BJ London, 런던
★★★★★ ·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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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름 어른이라 일단은 그를 먼저 배려했다. 이런 상태로 일터에 가면 신경이 쓰일 까봐,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줬다. 집에 와서는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긴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났는데 라이언에게 연락이 왔다. 홀본 근처인데 잠깐 보지 않겠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손절 당할 각이다 싶어서 얼른 재촉해서 나갔다. 공원에서 만난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링컨스 인 필즈 · Unnamed Road, London, 영국
★★★★★ ·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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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라이언의 여자친구가 합류했다. 비슷한 동년배의 그녀는 나와 곧잘 말이 통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다보니 참 재밌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의 대화 사이에서 라이언이 소외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남성미 넘치던 그도 여자친구 앞에선 곧 잘 귀여워지곤 했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구나.
Philomena's Irish Sports Bar & Kitchen · 40 Great Queen St, London WC2B 5AD 영국
★★★★☆ · 아이리시 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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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ip Tavern · 12 Gate St, London WC2A 3HP 영국
★★★★★ · 호프/생맥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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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왔더니 라피에게 긴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꾸 실망 시켜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같이 잘 해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참나. 그래도 잘못한 거 알고 반성은 하네. 으휴- 이런 걸 보면 정말 그를 미워할 수 가 없다. 아니면 아직도 콩깍지가 덜 벗겨졌나.
06.23.월 [워홀+328]_ 쉬어가는 월요일
이번 주도 근무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뭐가 문제 였을까 이것 저것 생각이 많아졌다. 라피는 펍에서 신기한 일이 있었다며 신이나서 전화를 했다. 그의 펍 단골손님 중 백만장자가 있는데, 라피와 술 한잔 하며 대화 하던 도중, 무언가를 해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술 기운에 한 약속이라 신뢰성이 없어보이기도 하고, 너무 터무니 없는 얘기라 그냥 웃기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계속 그렇게 손님들과 대화를 주고 받고, 네트워크를 형성해가는 그가 부럽기도 했다.
06.24.화 [워홀+329]_ 누군가 곁에 있다는 건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의 답을 찾았다. 설마 싶었는데, 역시 나였다. 억울함에 화가 나기도 하고, 회의감도 느꼈다. 같은 문제가 반복 됐다는 것에 대한 씁쓸함과 그런 상황에 전혀 대비되지 않았던 터라 좌절감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외부 촬영까지 해야 했다. 그 정신에 당연 잘 될 리 없지. 그래도 제법 프로페셔널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일을 마치고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데, 눈물도 안 났다. 그의 말대로 내가 그렇게 무능력한 존재인가. 어쩌면 맞을지도.
안 그래도 구직 문제로 조금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는데, 때 맞춰 맞은 폭탄이라 조금은 훌쩍 털어내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이렇게 사는 거겠지 싶고. 전처럼 속상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울고 털어내고 싶은 생각보다,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린 파크 · Green Park, London SW1A 1AA 영국
★★★★★ ·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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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이 떠가는 구름만 보내며 지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무렵, 라피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엔 그렇게 눈치가 없더니, 오늘은 또 눈치백단이었다. 쉬고 싶어서 다음에 보자고 하는 내게 한 시간 뒤에 우리집으로 갈 테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정말 만날 기분이 아니었는데, 거절할 힘조차 없어서 그냥 알겠다고 했다.
통화가 끝나고도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아, 공원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 집으로 왔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녀석은 갈 곳이 있다며 나를 버스에 태웠다. 방금 밖에서 들어왔는데 어딜 또 가나 싶었지만, 하도 갈 때가 있다고 성화를 부리는 탓에 잠자코 따라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소호였다. 라피는 기분이 안 좋을 땐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입맛도 없고, 아침부터 공복이라 혈당 스파이크 올 거라고 거절했다. 그래도 하루 쯤은 그래도 괜찮다고 자꾸 권하는 탓에 그냥 먹었다.
그렇게 먹은 당연히 아이스크림은 꿀맛이었다. 능숙하게 젤라또를 먹는 나와 달리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이 끈적거리는 그. 내가 혹시 아이스크림 먹어 본 적 없냐니까 또 발끈해서 자기 그렇게 시골에 안 살았다고... 알지 임마 깔깔.
Amorino Gelato - London Soho · 41 Old Compton St, London W1D 6HF 영국
★★★★★ · 아이스크림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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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첫 런던에 왔을 때, 누군가가 여기 아모리노 장미 아이스크림이 맛있다고 추천을 해줬다. 그렇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7-10파운드, 한화 약 만 사천원~이만원) 엄두가 안났었는데, 녀석 덕에 먹어봤네.
그리고 또 쫄래 쫄래 소호를 누비던 그. 당당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던 그는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이더니, 자기 계획에 체질이 생겼다고 플랜B를 실행 할 시간이란다. 평소에 데이트 계획이라곤 짠 적도 없던 그가 갑자기 백업플랜까지 생각해오다니, 기특해서 가자는 대로 따라 가줬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중식당 금룡. 사실 여기도 못 찾아서 내가 물어보니까 '용'이 보이면 알려 달란다. 한자 '용(龍)을 찾은 나의 활약으로 가게에 무사히 도착한 우리. 직원들은 불친절했지만 음식은 맛있었다.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해서 팁을 빼려고 하는 과정에서 소소한 소동이 있었지만 뭐 나쁘지 않았다.
Golden Dragon (Chinatown) · 28-29 Gerrard St, London W1D 6JW 영국
★★★★☆ · 중국 음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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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그에게 얘기했다. 라피는 그런 일이 있다고 세상이 끝나는 거 아니라며 위로했다. 네가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거 옆에서 지켜 봐 왔고, 그런 건 언젠가 빛을 발하는데 단지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말하면서. 덧붙여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닌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며, 그런 중요하지 않은 건 곱씹지 말고 흘려보내라는 조언과 함께.
그 작은 말들이 큰 위로가 됐다. 살면서 심지랑 수영이 말고 의지할 사람이 또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순간은 그가 참 든든하게 느껴졌다. 곁에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06.25.수 [워홀+330]_ Let's go grocery
괜찮은 척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이대로 있으면 큰일 나겠다 싶어, 몸을 일으키고 헬스장으로 갔다. 습관이란게 무서운 게 운동은 매일 하던 거라 일단 가니 어떻게든 또 꾸역꾸역 했다. 물론 집에 와서 다시 자빠져 버린 게 문제였지만.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오후 4시가 되도록 침대에 계속 누워있었다. 결국 그가 찾아와 밖으로 나가자고 졸라 댔다. 몇 차례 실갱이 끝에 찾아와 장을 보러 갔다- 아니 끌려갔다. 예전엔 그가 밖에 나가기 싫다고 누워있고, 그런 그를 달래 콧바람을 쐬어주러 나갔는데. 오늘은 그 반대였다. 이제서야 그때 그가 느낀 마음을 조금 알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식료품점 투어를 했다. 오세요에 가서 라면도 사고, 막스앤스펜서에 가서 빵도 사고. 나를 세인즈버리로 데려가더니, 대뜸 20파운드(한화 4만원) 송금 내역을 보여주며 말했다. "See I gave £20 to you. This is your play ground. Now whatever you want, you can have anything."
끝나고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왔다. 물론 나 말고 라피가. 이젠 제법 여유가 있어졌는지, 1시간 거리도 걸어 다니던 그는 10분 거리도 자전거를 타고 싶어했다. 대여앱 다운 받기도 귀찮고 둘이 타고 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그 혼자 보냈다. 덕분에 무겁게 짐 안 들고 가서 좋았다.
어쨋든 텅 비었던 냉장고가 가득 차니 좀 기분이 나아졌다. 이대로라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장을 봐주고 그는 사라졌다. 지금 너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누군가를 배려해주는 네 성격 탓을 잘 안다며. 본인이 같이 있으면 네가 온전히 쉬지 못할 거라는 말과 함께.
06.26.목 [워홀+331]_ 깨달음의 하루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틀린 건 내가 아니었음을. 이제 남들에 대한 배려는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다. 나를 지키기로 결심하니 감정의 화살이 정확히 반대로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온갖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마음이 요동치면서 당장 모든 걸 멈춰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태도도 접어두기로 했다.
잘 나오든 못 나오든 단 한 방울이라도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와야, 극단적인 선택을 피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와 닿았다. 결정을 끝내고 나니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저녁은 유부초밥을 만들어 먹었다. 요즘은 한국에서 먹던 음식들이 그립다. 그렇게 고국이 그리우면 한 달 정도 다녀오는 게 어떻냐는 라피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기분전환을 하려고 오래 전부터 보고 싶던 영화를 봤다. 인스타에서 유행하던 시상식 영상인데, 영화와 관련된 설정이라고 해서 줄 곧 궁금했었다. 뒤틀린 욕망과 미모에 대한 집착으로 파국을 맞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연출이 조금 기괴해서 보는 게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완성은 주연배우인 데미무어의 수상소감으로 완성된다고 본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 자신을 재단하고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다. 자신의 가치는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앎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그랬다. 며칠 전 누군가의 한 마디로 밥도 못 먹고 누워, 내 자신의 존재감을 부정했었다. 그러던 터라 그녀의 이런 소감들이 가슴에 더 와 닿게 느껴졌다.
저거 끝나고 다른 거 할려고 했는데, 라피가 갑자기 이걸 틀어줬다. <발루>라는 방글라데시 영화였는데 내 입장에선 약간 막장 영화였다. 연출은 꽤나 자극적이고 스토리는 조금 막장이었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의 나라에서 온 나는 스토리까지 잘 맞추면서 잘 봤다.
내가 이거 픽션이냐 아니면 어느 정도 사실을 반영한 이야기냐니까, 영화적인 연출도 있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란다. 멕시코나 콜롬비아처럼, 그 나라도 속사정이 많이 복잡해보였다. 우리나라 부정부패나 무질서는 정말 일도 아니구나 싶을정도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하루가 다 저물었다. 오늘 진짜 뭐 깨달은 바가 많네. 결국 이력서 쓰기는 내일로 미루기로.
< 궁금해할까봐 올리는 영화 줄거리_스포주의_결말 포함 >
남주 아이란은 최고의 망나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 선생님에게 폭력을 휘둘러 왔고, 본인 맘에 들지 않는 사람에겐 줄곧 폭력을 행사했다. 늘 마약을 달고 살았고 공권력을 무시하며 제 멋대로 살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베테랑 조태오 같은 캐릭)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인 미즈라때문. 권력을 거머쥔 그의 아버지 덕에 그는 원하는 것은 다 손에 쥐며 산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여주 니투가 나타나게 되고, 첫눈에 그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사회사업가인 니투는 세상 순수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여자였다. 니투에게 점점 빠져든 아이란은 그녀를 위해 마약도 끊고 범죄도 줄여가며 나름 새 삶을 살아간다. 그런 아들을 보고 여자친구인 니투를 집에 초대하라는 그의 아버지 미즈라.
그러나 미즈라와 마주한 순간 니투는 180도 변한다. 남자친구의 아버지 면전에 쌍욕을 날려준 것. (근데 따지고 보면 쌍욕도 아님) 사실 그녀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거짓 사랑을 연기한 것. 아이란의 아버지 미즈라 때문에 본인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게 되었고, 언니의 순결을 잃고 자살했기 때문. 그래서 미즈라의 아들인 아이란을 이용해 복수를 했던 것이다. (여기서 약간 아내의 유혹의 장서희와 이브의 서예지가 짬뽕된 느낌을 받았음. 물론 연출은 우리나라가 훨씬 더 세련되고 흥미롭게 함)
사실을 깨달은 아이란은 그래도 그녀를 포기할 수 없지만, 니투는 복수를 위해 더욱 그를 자극한다. 결국 아이란은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단 마음으로 그녀를 살해하는데(이 과정에서 삼촌의 음모와 반대편의 계략으로 남주가 여주에 대한 오해가 더 깊어짐.)
하지만 니투가 죽기 전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아이란은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 (갑자기 남주에 대한 폭력미화되서 좀 웃겼음) 결국 모든 걸 자백한 그는 죗값을 받고 사형에 처해진다.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반성은 안하고 순정남인척 하는 거 많이 어이 없었음)
06.27.금 [워홀+332]_CV drop
아침에 일어나서 CV 다시 쓰고, 운동 하고. 끝나고 나서는 씨비 드롭(이력서 뿌리고 다니기)을 시작했다. 솔직히 요즘 누가 오프라인에서 구직을 하냐고. 웬만한 데는 인터넷 모집으로 바뀐 거 아는데, 라피가 하도 오프라인 지원도 해보라고 성화여서 그냥 한 번 해주기로 했다.
처음에 인쇄소에 갔을 땐 아무도 없었다. 10분 정도 센터를 돌아다녔다가 다시 가보니 다행히 누군가 있었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그 아저씨는 금요일이니까 해피프로모션으로 1파운드에 10장을 인쇄해주겠다고 했다. 코인이 없어서 카드로 긁는다고 하자 세금을 추가하긴 했는데 어쨋든 인쇄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던 츤데레 아저씨는 인쇄한 게 이력서라니까 창고에서 봉투를 가져와 넣어주셨다. 봉투값만 해도 1파운드는 족히 넘어 보였는데, 인쇄지 품질도 남다른 게 느껴져서 만족스러웠다. "Good luck."을 외치는 아저씨를 보니 가슴이 푸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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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말이 효과를 발휘했던 걸까? 몇 달 째 못 찾고 있던 커플링을 찾았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결제를 위해 동전을 찾다가 발견했다. 잘 안 입던 재킷 주머니에 넣어 놓고 깜빡 잊어버렸던 것이다. 받은 지 2주 만에 잃어버려서 라피 볼 때마다 미안했었는데 껄껄. 드디어 찾았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자주 가던 카페랑 베이커리를 들러서 구인 문의를 했다. 사실 너무 오랜만에 해보는 거라 좀 떨리고 긴장됬는데 두 세번 묻다보니 또 그렇게 어렵지 만은 않게 느껴졌다.
예상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가게들이 온라인으로 서류를 받지만, 예의상 CV를 묻는 곳이 있어 인쇄본을 전달하고 왔다. 방금 갓 나온 따끈따끈한 이력서라고 스몰톡도 하면서 깔깔.
06.28.토 [워홀+333]_ 김라피씨에 관하여
이번 주 일기는 라피 특집. 다들 궁금해하는 듯 하여, 오늘은 그에 대해 이야기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깔깔 재밌게 봐주세요.
작년 가을, 우리는 처음 만났다. 매우 불쾌하고 당황스러운 첫 만남으로. 사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내게 있어, 첫 만남에 성질부터 빡 낸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가까워진 걸 보면, 정말 드라마나 영화가 꼭 현실과 동 떨어진 얘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처음엔 그가 참 같잖았다. 그래서 그가 내게 다가왔을 때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조그만 게 플러팅은 엄청 잘해서 여자 꽤 나 만나고 다녔겠다 싶었다. 형들한테도 따박 따박 할 말은 다하고 다니면서, 성질 못 죽이고 쌈박질 했다는 소문도 있고. 엮이면 괜히 피곤하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이 전에 사갈에게 상처를 받았던 터라, 관계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던 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그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음악 취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다른 이웃들과 달리 항상 팝송을 들었는데, 그게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어렸을 적 듣던 Boney M의 노래부터 시아, 아델, 샘 스미스, 찰리푸스까지. 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만 귀신같이 아는 기분이었다. 다른 이들이 주방에서 노래를 틀 때면 소음처럼 들려 굉장히 불편했는데, 그가 노래를 틀 때면 향수를 느끼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쩔 땐 옆 방에서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노래가 기대되기도 했다.
cf)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정치 성향, 가치관, 종교 만큼이나 연인을 만나는 데 있어 중요한 결정 기준이 음악 취향이라고 한다.
"사랑에 빠지는 데 음악 취향이 영향 준다"
노래나 춤으로 음악을 표현하거나 음악을 선호하는 경향의 '음악성(musicality)'은 사랑에 빠지고 감정을 지속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학계의 견해가 조명됐다. 오늘날 음악성을 공유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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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종종 내 방문 앞에 꽃을 두었다. 간식이나 맥주 같은 조그만 선물과 쪽지와 함께. 그 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런던에서 만나는 이웃들은 정말 친절하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그와 조금씩 가까워질 무렵, 그는 나와 다른 감정을 갖고 있음을 고백 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단호하게 거절하며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내게 소중한 존재가 생긴다는 건 꽤 나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성공하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런던에 왔는데, 행여 그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상실감에 귀국을 택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힘들 때마다 곁을 지켜주던 그에게 점차 스며들고 말았다.
이제 라피는 조금은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다. ''서로 엄청 좋아하니까 이제 그만 인정헤"라는 주희의 말처럼, 종종 생각보다 깊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확인한다. 다시 누군가를 마음에 품게 되는 일도,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를 갖는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아무튼 나는 이 조그만 소년과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계에서 많은 걸 배우고 있다. 아직도 미성숙한 행동을 하는 나와 어린 나이임에도 단단한 그를 보면 꼭 성숙이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 다는 점. 지지고 볶고 가끔 놓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인연도 그만큼 내가 애정이 깊기 때문이라는 점 등등.
뭐 결론은 힘들고 지칠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잘 버텨낼 수 있는 건 어쩌면 그가 있어서 때문인 것 같다. 쓰면 쓸 수록 글이 지저분해져서 이 주제를 왜 쓰기 시작했는지 점점 후회가 되네. 여하튼 어떻게 마쳐야 할 지 모르겠는 라피 특집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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