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토_ 잊을 수 없는 하루
정말, 삶이란 예측 불가능하다. 그 일이 일어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무릎 컨디션도 괜찮고 잠도 제법 잘 잔터라 아무 걱정이 없었다. 날도 생각보다 춥지 않았고, 비 오던 하늘도 금세 갰다. 고향집에서 아침먹고 야끼만두까지 잘 사서 역으로 갔다.
물론 역 근처에서 간식거리도 빼곡히 사고 말이지. 과자도 사고, 빵도 사고, 파이도 사고, 음료까지 야무지게 챙겼습니다. 아주 태평하게 릴스도 찍었거든.
기차타기 전 화장실을 들를 때만해도 크게 심각하진 않았다. 약간 이상하다싶었고, 뭔가 불편하긴 했지만 곧 해결될거라 생각하고 기차를 탔다. 그때는 이 일정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발권도 내가 했고, 전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 나 뿐이었다. 오랜만에 산행하는 민주는 들떠보였고, 작년부터 못했던 산행만큼 꼭 좋은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타지말았어야 했다. 그 길로 병원에 갔어야 했다.
기차 안에서 계속된 통증에 심각성을 느낀 나는, 정선역 근처에 병원을 검색해보다가 점점 까마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통증이 계속됬고 심지에게 연락했더니 그럴거면 중간에서 내리라고 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하긴 민둥산역에서 내린다고 해도 병원을 바로갈 수 있을거란 보장도 없잖아.
그래도 계속 고민이 됬다. 이 산행이 그냥 산행이던가, 작년부터 미뤄졌던 일정아닌가. 이제 무릎도 멀쩡한데, 그냥 진행해야될까? 어쩌지? 그렇지만 통증의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이대로 산에 가다간 더 큰일 나겠다 싶어서 애들에게 먼저 가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말하고 나서도 미련이 남아서 참고 가볼까 생각했지만, 통증이 밀려오면서 점점 자신이 없었다. 제천역에서 내려서 다시 돌아가는 표를 끊었다.
예상치 못했던 변수라 많이 당황스럽고 좌절스러웠다. 그래도 내릴 수도 없는 비행기 안이 아니라 다행이다. 시합이나 발표같은 더 중요한 일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나를 위로했다. 서울까지 얼마 안 걸리길래 차라리 여기서 해매지말고 집 근처로 가자 싶었다.
입석으로 기차를 타고 가다가 자리가 없어서 통로로 나왔다. 차창 밖 풍경이 너무 예뻤다. 살짝 통증이 잦아들길래 집 가서 해결이 되면, 다시 차타고 내려갈까 생각했다. 정말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을 찾았으나, 주말 오후라 이미 다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약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약국에서 약을 사서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면 잘 해결될거란 예상은 정말 그냥 내 바램이었다. 정말 눈물도 나오지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결국 응급실로 갔다.
내 생애 첫 응급실. 이곳에서의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정말 차가운 병실 바닥이란 말이 떠올랐다. 너무 아픈데 의료진은 무심히 팔찌를 채워주고 자리를 떴다. 복통과 구역질이 몰려와서 눕기도 힘들었고, 간신히 침대를 짚고 서있는데 정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엑스레이를 찍고 대기하는 동안 너무 긴 시간이었다.
응급실은 생각했던 것처럼 괴성이 난무하고 피가 낭자한 곳이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누워있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하긴 당장 나조차 피칠갑을 한 것도 아니라 남들 눈에는 나도 응급환자처럼은 안 보일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일반 병원 다닐 때도 의료진이 친절하다고 느낀 적은 많이 없는데, 여긴 정말 무관심한 느낌이었다. 침대에서 덩그러니 진료를 기다리면서, 밀려오는 통증을 감내해야 했다. 정말 나는 혼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왜 사람들이 응급실 가도 별 거없다는지 알겠더라. 딱히 별로 해주는게 없다. 그래도 뭐 그 응급처치덕에 나는 살아났다. 집에 오니 애들이 민둥산 잘 다녀왔다고 사진을 보냈다. 휴 예쁘네. 내일은 어디라도 나가야지. 정말 너무 어이없는 날이었다.
10.22.일
오랜만에 11시까지 계속 잤다. 몰랐는데 어제 많이 피곤했나보다. 밥은 했는데 반찬 할 기운은 없어서 시켰다. 오늘이라도 민둥산 당장 달려가겠다던 사람은 웬걸. 정말 택도 없는 희망이었다. 그냥 기운이없다. 휴 우리아빤 밥도 안해주고, 아파도 알아서 살아남는 우리집은 강하게 크는 집이다.
점심 먹고 앉아 있는데 볕이 너무 예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맘도 잠시, 곧 몸이 안좋아져서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은 접었다. 먹고 비우고를 반복, 지친 마음에 또 누워서 자고 일어났다.
확실히 자고 일어나니 몸이 훨씬 좋아지긴 했다. 몸이 좀 나아지니 청소기도 돌리고, 냉장고 정리도 하고 빨래도 접고 물도 끓였다. 방 정리는 반 정도 했는데, 앨범정리가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앨범은 사진앨범과 편지함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하다보니 정말 많은 인연과 내가 닿았던 것을 깨달았다. 여러 친구들이 있고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이 느껴지면서도, 지구 저 반대편에서도 나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주던 이들을 너무 못챙겼나 싶기도 했다. 올 해 크리스마스엔 꼭 다들 선물을 준비해서 보내야겠다.
인정하긴 싫지만 난 늙었다. 돌도 씹어먹던 위장튼튼 젊은이는 옛 이야기이다. 내 신체능력은 퇴화했다. 밤새 놀아도 멍쩡하던 피끓는 청춘은 지난지 오래다. 심지어 마음의 여유마저 없어서 싸우는 것도 귀찮다. 성질이나 화도 애정과 기운이 있어야 내는거구나. 모든 일에 심드렁한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은 어쩌면 그냥 기운 없는 사람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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