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24년 10월 첫 번째 일기 (10.01~10.03)_ 서른 여섯, 영국에 왔습니다.

by 킹쓔 2024. 10. 4.
반응형
10.01.화 [워홀+63]_낭만이란 이름으로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려고 했으나 몸이 따라 주질 않네요. 이것이 나이 먹었다는 증거인가 보다.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뭘 시작해보려니 쉽지 않네. 삭신이 쑤시는 관절통은 안 하던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려나 아니면 매일 같이 흐리멍텅한 여기 날씨 때문이려나. 확신은 안 서지만 어느 쪽이든 몸이 적응하는 기간이길. 

오늘의 저녘겸 내일의 아침

 고민 끝에 일단 이번 주는 오늘까지만 일하고 쉬기로 했다. 식당에서 주는 저녘밥을 반으로 갈라 내일 아침을 위해 싸왔다.  수습 떼자마자 쉰다는 게 웃기고, 당장 먹고 살 게 걱정이지만 어쩌겠어. 이대로 가다간 내 손가락이 영영 망가져버릴 것 같은 걸. 앞으로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정도로 생각하자. 대신 쉬는 동안 식당 인스타그램 홍보 업무를 준비해보기로 했다.  

낭만 가득한 런던의 밤 거리

 그리고 조금 걸어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다. 도로 위 지나가는 차들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돈 아끼려고 걷다가 이런 광경을 보네. 식당에서 밥을 먹는 건 비싸니까 포장해서 공원에서 밥을 먹고.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클래식 월드에 산다고 말하는 거. 어쩌면 여기 생활의 대부분은 가난함을 낭만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는 하루하루 일지도.

깨끗히 잘 쓴 바디로션 / 알뜰히 잘 쓴 산돌구름

 샤워 후에도 나의 낭만은 계속 되었다. 다 쓴 바디로션 튜브를 잘라서 남은 잔여물을 긁어모아 몸 구석구석 발랐다. 살면서 이렇게 까지 절약해 본 경험이 있던가. 매우 유복하게 살았다고 하진 못하겠지만, 한번 쯤은 있어도 좋겠네, 여러 번은 사양하고 싶고.
 
 마치 배고픈 예술가 같다. 일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고흐나 이중섭처럼 지금의 내 이런 시간들도 나중엔 뭔가를 꽃 피워 내는 단단한 뿌리가 될까? 지금의 고생은 나중을 위해 참을만한 경험일까? 
 
 생물학적인 나이는 점점 들어 신체는 노령화가 시작되어 가는데 반해, 정신적 성숙은 여전히 어린아이 그대로 멈춰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은 낭만이란 이름으로 버틸 수 있는 단계라 조금 기쁘기도 하고.  


 10.02.수 [워홀+64]_ 우당탕탕 플랫 라이프

 
 드디어 라디에이터를 고쳤다. 오랫동안 플랫 매니저인 파르토와 직원인 싸이에게 라디에이터에 대해 얘기했지만 서로 미루기 급급했고, 결국 이 주동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플랫 관리업체 사장인 조이에게 다시 연락 했다. 사실 지난 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망설였지만, 이미 시간도 열흘 정도 지났고 당장 내가 추워 죽게 생겼는 걸.

 

 그리고 다음 날 그가 바로 찾아왔다. 몇 차례 버튼을 바꿔 돌리자마자 라디에이터가 작동했다. 참나- 이렇게 풀릴 걸 며칠이나 고생한거야. 방안이 바로 뜨끈뜨끈해졌다. 이것이 라디에이터의 힘인가. 역시 조이가 짱이다. 

 

 갑자기 내일 면접에 올 수 있냐고 연락을 받았다.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회사의 고객관리 및 세일즈 업무인터뷰였다. 이렇게 얼렁뚱땅 오라고 하다니, 일하다 갔으면 큰일 났을 뻔. 이번주 휴가 내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다고 면접 준비를 엄청 열심히 한 건 아니다. 요즘 채용공고도 제대로 읽지않고 무대뽀로 지원한 곳들도 있어서 정확한 업무인지 어떤 회사인지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전 지원현황을 뒤지는데도 이미 마감된 건지 해당 공고가 보이질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그냥 장이나 보러 갔다가, 옆방 일리앙과  마트에서 마주쳤다. 본인도 저녘거리를 사러 왔단다. 하지만 절대 같이 장 보긴 싫은 걸. 그럼 좋은 시간 보내라며 황급히 다른 곳으로 숨어버렸다. 금연구역인 방에서 뻔뻔하게 담배 피워대고, 종종 "what?"이라고 무례하게 묻는 그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그는 오히려 더 내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사람들이랑 잘 지내는 노하우가 있냐느니, 찾고 있는 일은 어떤 분야인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냐며 이것 저것 대화를 시도했다. 그때마다 바쁜 척을 하거나 대충 대답을 잘 피해나갔지. 

 

 그런데 그가 곧 방을 뺀다고 한다. 자기 다음으로 한국인 메이트가 오면 좋을 거 라며. 아버지가 아파서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몇 달 후 돌아올거지만 그동안 방세를 감당하긴 힘들다는 말과 함께. 그 말을 듣자 마음이 불편했다. 지병이 있는 내 아버지와 경제적인 문제로 귀국을 고민하던 내 모습과 그와 겹쳐 보였다. 너도 힘든 상황에 있었구나. 괜히 줄 곧 그 애를 밀어내던 내 자신이 속 좁게 느껴졌다. 

 어쩌다보니 두 시간 동안 저녘을 먹었다. 곧 떠나는 윤과 얘기 하다 보니 시간이 후딱 가더라. 디저트를 먹는데 또 쥐가 나타났다. 이전의 작고 귀여운 생쥐가 아닌 병균을 옮길 수 도 있는 들쥐였다. 이럼 이야기가 다르지. 밥을 먹다 말고 쥐구멍을 메꾸고 쥐덫을 설치했다. 쥐 때문에 조치를 취해놨으니 조심하라고 플랫 단톡방에 올렸는데 갑자기 슈룹이 방에서 나왔다.

생애 첫 쥐덫 설치

  본인 방에서도 종종 쥐가 나온다고 호소하면서, 랜드로드(집주인)과 부동산이 쥐 문제에 대해 인지가 부족한 것 같으니 나보고 강력하게 얘기를 해달란다. 아니 그걸 내가 왜...? 같은 방글라데시 사람끼리 말도 훨씬 더 잘 통할텐데, 왜 나한테 총대를 매라는 건지 이해가 안됐다. 그래도 당장 쥐가 아랫층으로 내려올 수 도 있고, 나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 중 하나라 조심스럽게 단톡방에 쥐 문제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고 에둘러 말했다. 

 

 어쨋든 슈룹의 저런 태도는 솔직히 조금 웃겼다. 이전에 사갈의 잠금쇠 고장에 대해 언급할 때, 그는 "네 방 문제도 아닌데 왜 네가 언급하냐"며 면박을 줘놓고. 정작 본인  방에서 일어난 문제는 왜 나를 시키려고 하는가? 정말 모순덩어리야. 남이 부엌을 지저분하게 쓴다고 지적하면서, 본인이 세탁기랑 화장실을 사용할 때 마다 엉망이 되는 건 모르나 보지. That's Hillarious.

 

 밥 먹고 쥐덫 설치하고 말도 안되는 그의 얘기까지 들어주고 나니 10시가 되었다. 보통 취침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인데도 생각보다 진이 많이 빠졌는지 피곤했다. 열 두명이 함께 사는 이 플랫에서는 정말 지루할 틈이 없네. 


10.03.목 [워홀+65]_ 생애 첫 영어 면접을 끝내고 나서

 

 여섯 시부터 1시간 동안 울려댄 알람을 꾸준히도 껐다. 일찍 일어나서 면접 준비를 하겠다는 각오는 잊은 채로. 기상 직후에도 피곤함을 떨치지 못하고 한 동안 멍하니 있다가 주섬주섬 인터뷰 연습을 했다. 역시 뭐든 마감에 닥쳐서 바짝바짝 쪼이는 맛으로 사는 거지 뭐. 

오늘도 우중충한 런던 하늘

 

 면접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먼저 도착해서, 근처에서 예상질문과 답변을 연습했다. 회사는 런던시청이 있는 곳 근처였는데,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두 달간 런던에 있으면서 웬만한 곳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이쪽은 또 처음이네.

가는 길에 본 런던 지하철 (라임 라인)

 

런던 시청 앞 호수와 파수꾼들

 호수 앞에는 어린아이 키만한 오리들이 사는데, 제법 사람을 무서워하지않고 길거리를 휘젓고 다닌다. 누가보면 여기 경비원인 줄 알겠어요. 


 

런던 시청 · Kamal Chunchie Way, London E16 1ZE 영국

★★★★☆ · 시청

www.google.com

 

 곤돌라를 보니 여러 추억들이 스쳐갔다. 파주에서 타던 관람차, 남산 케이블카, 홍콩 대연람차, 평창 리프트 등등... 혼자 타는 건 비싸겠지? 나중에 디온 런던 오면 타러가자고 해볼까?

런던시청 앞 케이블카

 

 

IFS Cloud Royal Docks · 27 Western Gateway, London E16 1FA 영국

★★★★★ · 곤돌라 리프트 승강장

www.google.com

 

멋진풍경을 볼 수 있는 런던시청 앞 곤돌라

  여찌저찌 첫 면접을 마쳤다. 면접이라기보다 회사 소개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기본급 없이 인센티브만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이라니, 그러면 그렇지. 그래도 인터뷰지를 작성하고, 예상답변을 준비 하고, 영어로 면접을 봤다는 점에서 좋은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이제 면접관의 영어도 잘 들렸다. 그래 좋은 경험이었다. 

첫 면접 / 세인즈버리 앞 귀여운 개/ 달달한 점심

 점심은 집에 와서 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배고파서 근처 세인즈버리에서 2파운드(우리 돈 약 3천원)에 과자랑 우유를 샀다. 그걸 들고 집 가는 버스를 탔고, 2층 좌석 구석으로 올라가 조금씩 까먹었다. 아주 달달 하구만. 외노자 밥으로 아주 가성비 딱 이야. 

푸짐한 저녘상

 집에 와서는 한 들린 듯 요리를 했다. 라디에이터가 정상 작동한 이후로 방은 열대야 수준으로 뜨거워졌고, 그 탓에 침대 아래 보관 중이던 야채가 시들시들해져서 얼른 해치워야 했다. 그리고 조금은 열중 할 뭔가가 필요하기도 했고. 어제 오늘 내내 준비해서 간 곳이 별 시원찮은 회사였다는 게 조금 아쉽고, 몇 달 째 시도 중인 구직 과정 중에 제대로 된 면접 한 번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났거든. 음악을 크게 틀고 분풀이 하듯 열심히 야채를 썰어 댔다. 

 

 저녘을 먹다가 갑자기 지난 번 사장님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식당에서 함께 근무를 서는 동안, 사장님은 내가 몇 살인지 물어보셨다. 잊고 있던 나이를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내가 '나잇값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뭐-한국 사회에서 요구되는 나이 별로 요구되는 성과나 책임 같은 거 말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번듯한 직장에 자리 잡아서, 적당한 사람과 결혼하는, 소위 말하는 '성공한 인생'의 표준형 같은 거.

 

 그럼 나 번듯한 직장도, 결혼도 못했으니 성공 못 한 건가? 맞아. 그래서 성공하려고 온 거잖아. 남들 기준의 성공이 아닌 내가 꿈꾸는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 문득 내가 여기로 오기로 한 이유를 다시 떠올려봤다. 

 

 서른 여섯, 나는 자립심을 기르기 위해 영국으로 왔다.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혈혈단신의 몸으로 살아보고 싶어서. 그러면서 깨지고 부딪혀 스스로도 살아갈 수 있는 내공을 기를 수 있을 것 같아서.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려면 꼭 필요한 게 그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버텨보자. 외로워도 고단해도 혼자 견뎌내보자. 지내면서 쉽지 않다는 걸 계속 느끼지만 노력해보자. 정서적인 결핍 따위 지금 당장 해결 해야 할 생사와는 직결되지 않는 거라고 무시했지만, 그건 나한테 생존 만큼이나 중요한 존재라는 걸 재차 깨닫는다. 그치만 항상 풍족한 삶만 살 수는 없잖아? 황무지에서도 살아봐야지. 성장이란 시련 속에서 자라나는 법이니까.

제법 가득 찬 투두 리스트

  워홀 두 달 째, 크고 작은 시련 속에서 나름 성장 중입니다. 이젠 식당에 온 손님들에게 제법 스몰톡도 걸 줄 알고, 식비도 교통수단도 잘 활용해서 생활비도 지난 달보다 2백 정도 더 줄였다. 플랫 이웃이나 아는 사람도 제법 생겼고, 작지만 따뜻하고 편안한 내 공간도 있고, 뭐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나름 돈 나오는 구멍도 생겼고, 그래 제대로 된 건 아니지만 뭐 면접도 보고, 그런 의미에서 구직 활동도 전보다 효과적으로 하고 있잖아?

 

 그동안 적은 할일 수첩을 살펴봤다. 게을러질까봐 9월부터 적었는데, 벌써 이만큼 썼네. 블로그 속 일기도 다시 읽어봤다. 맨날 한 거 없이 논 줄만 알았는데, 사실 여기 와서 하루라도 그냥 보낸 적이 없네. 조금씩이지만 이렇게 매일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뭐든 되지 않을까? 실제로 그 시간들이 조금씩 모여 성과를 이루고 있고.

 

 그러니까 조금 더 버텨보자고 나를 다독여본다. 앞으로 더 성장하고 더 멋져질 내 모습을 기대해보면서. 나중에는, 그 때는 지금 이런 고생스러움들이 한 때의 추억으로 회자될 거라고 위로하면서. 내 나이 서른 여섯, 오늘도 영국에서 잘 살아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