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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4년 9월 열 한번째 일기 (09.24~09.26)_ 굳세어라 금순아

by 킹쓔 2024.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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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화 [워홀+57]_쉬는 날엔 옴팡지게 먹습니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아침상을 차렸습니다. 영국 삼겹살은 기름이 많이 없어서 오히려 먹기 좋다. 다만 비싸서 자주 못 사먹을 뿐 하하. 애들도 없길래 냄새 걱정 없이 김치도 꺼내먹고, 계란 후라이도 하나 하고, 김도 까먹고 풍요롭게 먹었다. 먹다보니 이것이 한국인을 위한 하울정식이 아닌가 싶네. 

K-하울 정식/ 출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새 로션 꺼낼 겸, 캐리어에서 짐 정리 한번 더 하다 발견한 감기약. 비록 코감기밖에 안되지만 너무 반가운걸. 과거의 나- 정말 장하다. 잘했어.
 
 너무 심심해서 신카로 레미제라블이나 볼까 했더니, 앱에서 계속 오류가 떴다 젠장할. 60파운드에 1층 앞 자리라 너무 맘에 들었는데. 5번 정도 결제 오류가 날 정도면, 미래의 내가 어지간히 싫었나보다. 그래 일단 질러 놓고 너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짓 안 할게...

럭키비키 감기약과 치즈떡볶이

  저녘은 한인마트에서 산 레토르트 떡볶이랑 계란을 먹었다. 분명 칼로리는 폭탄인데 배가 헛헛하니 고파서 과자를 주워먹었다. 근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주방에 올라갔다 파힐한테 또 한 접시 얻어먹었다. 진짜 한 그릇 달라고 올라간 건 절대 아닙니다만...

 식사 후에는 사갈이랑 세인즈버리로 장을 보러 갔다. 걔가 장난친다고 얼굴에 손을 대서 짜증을 냈더니, 자기는 너가 툭툭치는 거 안 좋아해도 참았는데 왜 짜증을 내냐고 했다. 할 말 없네. 그러면서 서운한 걸 늘어놓으며 투정 부리는 녀석, 마치 며칠 전에 내가 낸 짜증을 거울치료처럼 따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이 자식아. 으휴. 이제 제법 친해졌다 느꼈나보지?  


09.25.수 [워홀+58]_ 엄마랑 한판 한 날

 
 오늘의 아침은 팬케이크. 버터에 알룰로스 뿌려먹으니 맛있네. 역시 마이노멀 알룰로스가 짱이다. 관세 붙여서 비싸게 먹는 보람이 있네.
 
 아침 잘 먹고 그 기운을 엄마랑 싸우는데 써버렸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아니 밥 먹은 것 보다 훨씬 더 썼는지도 모르겠다. 지속된 자금난에 엄마도 나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물론 엄마가 더 크게 느끼고 힘든 상황일테지만,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슬아슬한 인증샷

 내일 모레면 입국 한 지 약 두 달이 되어간다. 아직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에 번듯하고 좋은 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당장 집세 내고 밥 먹을 수 있는 생계유지를 위한 일도 찾지 못했다. 한국에선 나름 나쁘지 않은 스펙인데, 여기선 최저임금 자리도 구하기 어렵다.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줄은 몰랐는데. 이번 달 월세를 내면 잔고가 0원이다. 친구들의 귀한 돈만 잔뜩 쓰고 뭐 하나 이룬 것 없이 돌아가야 하나 막막하던 차에 엄마의 "여행 다녀온 거라 생각해"라는 말이 내 성질머리에 불을 붙였다.
 
 정말 맘 편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좋은 걸 보면서 돌아다닌 날이 얼마나 있나. 하루하루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았는데 속 편하게 즐기다 온 사람처럼 여겨진 것 같아 화가 났다. 그냥 그렇게 좋게 생각하자는 엄마의 의도를 알면서도, 나는 갖은 불만을 쏟아내고 화를 냈다. 그게 엄마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리고 그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일을 나가야했다. 저녘 근무만 있는데도 몸이 피곤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내일은 집 밖으로 꿈쩍도 하기 싫어서 가는 길에 쿱에서 장을 봐서 갔다. 

오늘의 메뉴 김치찌게 / 베이컨과 우유


 집에 다 도착해가는데, 사갈이 파링턴쪽이라고 연락이 왔다. 일 끝났으면 같이 걸어가자고 연락이 왔고, 난 이미 도착했으니 역으로 마중나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녀석.
 
 물론 그 말을 들을 나도 아니지. 그냥 다시 지하철역으로 가서 그를 기다렸다. 안경이 없어서 개찰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웃으며 다가왔다. 사갈이었다. "너 진짜 고집 세다"면서. 

 사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꽤 기분이 좋았다. 여기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있을 거 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지원한 일 자리의 합격여부를 기다리거나, 집주인의 계약 연락을 기다리는 건 굉장히 지루했지만. 이렇게 '친구를 기다린다'는 건 참, 의미 있는 일이니까. 
 
 당장 굶어죽게 생긴 오늘에도 이런 감성적인 감상에 빠지다니. 역시나 나는 대문자 F인가보다. 


09.26.목 [워홀+59]_무지개를 기다리며

 
 엄마와 싸운 이후로 답답한 마음에 주희와 얘기를 했다. 그러다 그 애가 건넨 한 마디가 마음을 울렸다. "그런 힘든 상황인데도 열심히 잘 버티고 있구나."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 그래 잘 버텨내고 있구나. 그래도 노력하고 있구나." 같은 그런 말들. 막연히 잘 될 거라는 위로나 그 정도면 괜찮다고 대충 얼버무려버리는 대신, 나의 시간과 노력이 아무 의미 없지 않았노라고 위로해주는 말.
 
 그치만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살 수 있다면 그건 분명 현실세계는 아닐거다. 어제처럼 부딪히고 싶지 않아서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피했다. 나란 딸 참 못됬다.

 우울한 기분을 씻어내려 자꾸 무언갈 주워 먹었고, 혈당 스파이크때문인지 자꾸 잠이 왔다. 결국 뭘 하지도 못하고 출근을 하게됬다.

 영국의 날씨는 정말 변덕스럽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다가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뜬다.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다가도 부슬부슬 비를 내리기도 한다. 그런 날씨 덕에 종종 무지개를 볼 수 있다. 한국에선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귀한 몸인데, 여기선 제법 자주 보는 느낌이다.

 오늘 근무는 새루랑 함께했다. 친절하고 상냥한 그와 함께 일하면 마음이 편하다. 18살의 첫 일 자리를 여기서 시작해, 3년 동안 제 손으로 대학등록금을 마련한 그는 이제 캠퍼스 에서의 새 삶을 위해 이곳을 떠난다.

 내겐 마냥 멋지고 대견스럽기만한 그 애도 또래보다 늦은 시작을 걱정했다. 기숙사에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본인과 고민하는 것도 다르고 뒤쳐진 기분을 느낀다고.

바보같은 고민이라고, 넌 이미 그들보다 훨씬 멋진 길을 걷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어차피 자식은 언젠가는 부모에게서 자립해야 하고, 그걸 마흔이 다 되가는 나이에 시작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다고. 넌 남들보다 더 빨리 일찍 배운 거니 정말 대단하고 자랑스러워 해야하는 거라고 말해줄걸. 그러기엔 우리의 근무시간이 너무 바쁘고 나의 영어가 너무 짧았네.

 이 곳에 있다보면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삶은 훨씬 더 성숙한 태도로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충분히 안주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도전하고 고생길을 마다 않는 멋진 이들. 아버지 도움 없이 생활비를 벌어쓰려는 사갈이나 하루에 10시간 이상 공부하는 파힐, 대학 진학을 위해 스스로 학비를 버는 새루 등.

 그래서 아직은 여기서 더 살아보고 싶다. 비록 하루 하루를 즐기기보다, 버티고 견뎌내야 하는 날들이지만. 그럴수록 내 세계가 깊고 넓어지는 여기 삶에 점점 애정이 깊어지고 있으니까.

 내 삶에도 무지개가 떴으면 좋겠다. 종종 찾아오는 햇살이 금방 아스라이 사라진다해도, 잦은 비에 몸이 젖어버티기 힘들어질 수 있어도, 잠깐 찾아오는 그 존재의 반가움으로 잠시 고단함을 녹일 수 있길. 더 크고 다채로운 일곱빛깔 무지개로 내 삶을 물들일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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