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0.금 [워홀+53 ]_ 독하다 독해 영국감기
혼자 살면서 아프다는 건 꽤 나 외로운 일이다. 다행히 심각하게 아픈 게 아니라 감기 정도의 가벼운 질병이었지만, 그 작은 힘듬조차 한국에서 아플 때랑은 느끼는 바가 많이 달랐다. 컨디션이 좋든 말든 그런 거에 대한 사정 봐주기 없이, 정말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병원도 약도 찾기 힘든 상황인데, 생계를 위해 당장 일도 해야 하니 말이다.
요 며칠 좀 무리한 거 같긴하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호르몬 때문에 컨디션이 많이 떨어진 상태임은 잘 알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일교차 외에도 온도 차가 큰 환경에 계속 노출 된 것도 사실이다.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는 샤워기라던가 고장난 라디에이터가 고장난 방이 내가 사는 플랫이었으니까. 게다가 요 며칠 트라이얼을 한다고 일도 하고 거기까지 걸어다니느라 몸이 피로감을 느꼈을 거다. 얼마 전 감기를 앓았다던 사장님이나, 며칠째 방에 드러누워있던 쇼분에게 옮았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걸릴 줄도 몰랐다. 한국에선 잘 걸리지도 않았던 지라 약도 안 가져왔는걸. 피부과약, 소화제, 별 게 별 게 다 있었지만 감기약만 딱 없었다. 젠장.
그 아픈 와중에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식사를 차렸다. 주방에서 콜록대면서 밥을 차리는데 사람들에게 괜히 미안했다. 사갈한테 물어보고 약을 받았는데 도저히 내가 알 수 없는 약들이라 그냥 포기하고 약국으로 갔다. 구글 평점이 낮은 곳이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큰 문제 없이 감기약을 구입했다. 목도 아프고, 콧물도 나고, 재채기, 발열까지 정말 감기종합세트라고 종합감기약을 구입했다.
데이용 약에는 카페인이 들었다고 해서 나이트용만 먹었는데, 크게 별 효과가 없었다. 목 염증에는 살짝 효과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막 크게 컨디션이 좋아지는 느낌은 아니었달까? 진짜 너무 쉬고 싶었는데, 근무가 잡혀잇어서 맘 편히 있지도 못했다. 수습기간이라 안 나가면 채용에 큰 영향이 있을텐데. 다행히 갑자기 트라이얼도 취소되서 잘 쉴 수 있었다.
아파서 누워만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동안 미뤘던 영화를 봤다. 김우빈이 나오는 넷플릭스 영화 <무도 실무관>인데, 그냥 법무부 홍보용 영화 같다. 뭐 그래도 자주 다녔던 중랑구도 나오고 시원시원한 액션도 보이고, 타임킬링용으로 나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낮보다 열과 근육통이 심해졌다. 아까 사갈이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 하랬는데, 내가 지금 필요한 건 그가 줄 수 없다. 여기서 아프니 혼자라는 게 더 실감이 난다. 한국에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넌 혼자가 아니라고, 곧 괜찮아진다고, 걱정말라고 꼭 안아줬으면 좋겠다.
09.21.토 [워홀+54]_ 아파도 할 건 해야하니까요
물이 떨어졌다. 그래서 아침 7시에 물을 사러 세인즈버리로 갔다. 오픈시간이라 사람이 많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한국에서 새벽녘 지하철을 타며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가고 뭘 하러 가나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근육통을 무릎부터 손가락 끝까지 마디마디를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움직일 때 마다 관절의 통증이 느껴져서 거동이 불편했지만, 이 타지에선 정말이지 아무도 그런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 6L짜리 생수를 어깨에 이고 오면서 느꼈다. 이게 가장의 무게인건가... 정말 아프면 안 되겠구나.
물 사면서 장 봐온 걸로 고추장찌게를 끓여서 밥을 만들었다. 햇반 살 돈이 없어서 그냥 바스마티(주로 인도같은 서남아시아에서 주로 먹는 쌀의 한 종류)를 샀는데, 한 숟갈 뜰 때마다 정말 찰기 없이 후두둑 바스라져서 맥이 빠졌다. 이런 걸 어떻게 손으로 먹는거야 얘네는...
의외로 감기 때문에 몸이 힘들 때 생각났던 음식은 바나나푸딩이었다. 얼큰한 국물과 따뜻한 밥이 아닌, 약수역에서 태봉이랑 미진이랑 함께 먹던 그 디저트. 그들과 함께했던 청화산도 떠올랐다. 바나나 푸딩이 그리운 건지 그 때 누군가가 날 위해서 정성스럽게 준비해줬던 무언가가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 자꾸 한기가 느껴져서 민주가 준 핫팩을 꼭 껴안았다. 이거 없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앞 방 애가 자꾸만 방에서 담배를 피워 댄다. 이 건물은 금연 구역이 분명한데. 참다 못해 플랫 그룹챗에 얘기를 했다. 특정인을 저격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그러라고 만들어진 채팅방 아니었냐고. 얼마 전부터 채팅창은 어지러진 부엌이나 화장실을 깨끗하게 쓰자고 시끄럽다.
몇몇 사람들 때문에 엉망이 된 공용 공간 복원 차원에서, 여러 명이 컴플레인을 걸고 있다. 물론 그 중에 제일 활발한 건 나고. 뭐 딱히 큰 효과는 없어 보인다. 그래 부동산 아저씨가 불편한 거 있으면 여기 얘기하라고 했는 걸. 웬만한 건 참고 살려고 했는데 담배는 진짜 못 참겠다.
09.22.일 [워홀+55]_ 제법 어른스러워진 모양
오랜만의 휴일인데, 사갈이 연락이 없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일요일날 놀러가야되니까 아픈 거 다 나으라고 할 땐 언제고. 어제 그래서 내일 뭐할거냐니까- "잠?"이라고 대답하는 꾸러기 녀석.
충분히 재운 다음 어디 놀러 가자고 하려 했는데, 좀처럼 깨어날 기미가 없다. 기다리다 못해 혼자 걸어서 소호까지 왔다. 런던 소호에는 한국 식료품점인 오세요와 H마트가 붙어있어 쇼핑하기 좋다. 당장 쌀도 떨어지고 먹을 것도 없으니까.
네다섯시가 되자 사갈에게 연락이 왔다. 어디냐고 방금 일어났다고 미안하다고. 우리는 일정약속 문제로 몇 번 말다툼이 있었다-물론 나의 일방적인 불만 주장이었지만-시간을 칼처럼 여기고 일정을 만드면 꼭 지키는 나와 달리 물 흐르듯 여유롭게 지내는 그의 성격은 확연히 달랐으니까. 그래서 실망도 많이 하고 종종 화도 났다.
안다- 그는 그냥 뭘 할 기운 없이 피곤한 건데, 그걸 자꾸 관계에 대한 애정으로 결부시켰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그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았다. 일도 하고 인턴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소셜라이징까지 열심히 하는 그를 알기에, 이젠 이해한다. 그래 너도 좀 쉬어야지. 왠지 반복된 야근으로 늘 잠이 많은 심지를 두고, 혼자 놀았던 한국에서의 삶이 생각났다. 여기서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에휴 어디 부지런하고 빨빨거리면서 잘 돌아다니는 사람 없나.
영국 버스는 정말 별로다. 분명 한국보다 요금은 비싼데 제 시간에 오는 법이 없다. 특히 15번 버스는 연착이 너무 잦다. 집으로 한 번에 가는 걸 타고 싶어서 선택했는데, 차량 수리문제로 중간에 내려서 갈아타야 했다. 그것도 수십분을 기다린 후에.
그런 고됨을 겪고나니 단 게 땡겼다. 있던 디저트를 모두 털어 바나나푸딩을 만들었다. 포도당아-힘들게 집까지 온 내게 힘을 좀 다오.
집에 오니 사갈이 괜찮으면 좀 걷자고 해서 라임하우스 베이슨으로 갔다. 운하를 따라 걸으면 멋진 항구가 나오는데, 센트럴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아 접근성도 좋고, 런던에서 걷기 좋은 곳 중 하나이다.
정착된 선박들 위로 지하철이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은 굉장히 멋졌다. 수영이랑 심지랑 같이 봤던 잠실대교 지하철이 생각나기도 하고. 내가 지하철 영상을 계속 찍자 사갈이 얼마 전 새로 산 아이폰16프로를 내밀었다. 캬 역시 새폰이 좋긴 좋구만. 그치만 그 폰으로 이렇게 밖에 못 찍다니 너는 유죄인간이다 정말.
가는 길에 우리는 서로 또 언쟁을 했다. 시작은 사갈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알려달라고 하면서 였다. 못된 나는 지난 번 느꼈던 짜증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 네가 한국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네, 너 중국이랑 한국 구분도 못하잖아"
" 모를 수 있지, 모르면 알려주면 되는 거 아냐?"
" 한국에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난."
"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난 북한과의 관계도 알고 있고..."
" 그거 말고 뭘 아는데, 너 K-pop이나 한국음식 아는 건 있어? 한국영화는? "
" 그걸 모른다고 해서 한국에 관심이 없다는 건 아냐.
수- 너는 얼마나 파키스탄에 대해 잘 알아? 이 사람 알아? 너도 모르잖아. 마찬가지야. 모르면 알려주면 되잖아"
그는 잘못이 없다. 그냥 나는 종종 이곳에서 당하는 중국인 취급이나 북한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지쳤을 뿐이다. 그걸 그에게 쏟아 낼 필요는 없었지만 조금 서운했던 모양이다. 구글링만 해도 나오는 걸. 내가 사는 한국은 중국보다 더 멋지고 북한과 관계없는 힙한 곳인데, 디온네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설명할 필요 없던 그런 수고로움을 매 번 소모해야 하는데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나는 다른가. 나도 그의 나라인 파키스탄에 대해 잘 모르는 걸. 내가 찾아본 거라곤 파키스탄어 기초회화 몇 개인걸. 아니면 한국은 유명하니까 너희는 다 알아야되고, 파키스탄은 몰라도 되는 그런 나라라고 편협하게 생각했던건지 조금 부끄러웠다.
밤이 되자 또 열이나고 기침이 시작됬다. 오늘 사갈이 피곤해서 못 나온 걸 내가 이해한 것 처럼, 감기도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이 땅에서 아파도 징징대지 않고 잘 견뎌내려 하고 있으니 좀 봐달라고. 지금보다 제법 어른스러워진 모양으로 향해갈 수 있도록.
09.23.월 [워홀+56]_몸이 아파도 나 이렇게 웃어요
아침은 어제 사갈이 사다준 할랄피자를 먹었다. 맛은 약간 빨간고추 피자같기도 하고. 나쁘진 않았지만, 한국의 치즈가득 토핑가득 피자가 그립군요.
오전 7시인데, 이번 주 근무일정이 나오지 않아 사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깜빡하신 모양이었다. 수목만 근무가 잡혔다고 하셨는데, 갑자기 오늘 오전에 나와줄 수 있냐고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가는 길에 저녘까지 근무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떤 분이 몸이 안 좋아서 근무 펑크가 났고, 내가 급작스레 대타로 세워진 모양이다. 뭐 나야 돈 버니까 좋지. 라고 좋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나도 호르몬 영향을 크게 받는 시기이고 감기도 안 떨어졌는데라는 불만부터 먼저 터져나왔다.
오전 근무가 끝나고 카페에 갔다. 3시간 정도 비는 타임이라 수퍼바이저님이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권하셔서 갔는데, 4파운드나 써버렸다. 예상했던 가격은 3파운드 정도인데, 서비스차지가 더 붙을 줄 몰랐다. 어쩐지 물을 너무 열심히 따라주더라.
그래도 풀근무를 서는 덕에 점심 저녘을 다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점심은 치킨을 먹고 저녘은 된찌를 먹었다. 점심 땐 밥을 많이 남겼는데, 저녘 땐 완뚝했다. 역시 한식이 최고야.
손님이 많지는 않았는데, 오전부터 계속 서있다보니 몸이 피곤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티를 내니까 수퍼바이저님이 조금 일찍 퇴근 시켜주셨다. 지친 몸을 안고 집에 왔는데 화장실에서 수염폭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함께 공용화장실을 사용하는 남자 중 하나각 면도를 할 때마다 사방에 본인의 수염을 뿌리고 간다. 매 번 말없이 그걸 치웠는데, 오늘은 칫솔까지 들어와있어서 정말 화가 났다.
거실에서 무릎찜질을 하고 있는데 앞집 알레인이 와서 왜 런던으로 왔냐고 물었다. 아 방에서 담배피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밥맛없는 이 놈. 말을 섞기 싫어서 얼버무렸더니, 대뜸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그가 스몰톡을 시도하고 있단 건 알지만 응해주기 싫었다. 그러자 그는 내게 설교를 시작했다.
런던은 2년 전부터 불황이라,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다. 여기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안 하지만, 아시아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는데 왜 안 쓰는지 모르겠다. 자국에선 고급인력이 여기와선 허드렛일을 하는게 웃기다고 말했다. 아- 그 때 난 긁혀버렸다.
오늘 고된 일과를 보냈지만 이렇게 일해도 방세는 만들 수 없어서 현타가 왔는데, 그가 정확히 그 점을 집어버린 것 같았다. 근무를 같이 섰던 수퍼바이저도 작년에도 일을 구하기 힘들었다고, 요즘 여기 경기가 안좋다고 말했다. 그런 시기에 나는 영국에 와있구나.
침대에 누웠는데 온 관절이 욱신거렸다. 주짓수를 한 것도 아닌데 무릎이 아프고 손가락이 쑤셨다. 여기선 아프면 물리치료도 못받는데...상태가 더 안좋아지면 어쩌지. 적응이 될까? 이렇게 아프면서까지 이 일을 하는 게 맞을까? 아니 여기 있는 게 맞나?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가도 뾰족한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는 걱정들 주머니 속 휴지처럼 꾸깃꾸깃 무의식 속으로 접어넣어본다. 어쩌겠어 아파도 그냥 넘겨야지. 웃어넘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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