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수 [워홀+78]_런더너의 삶이 지칠 땐, 뮤지컬을 보세요.
런더너로 산다는 것의 장점을 뽑자면, 바로 '뮤지컬'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와 더불어 영국 웨스트엔드는 세계적인 뮤지컬의 메카이니까. 내놓으라 하는 월드스타들과 최정상급 연출가들이 즐비하지만,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런 장점을 활용, 뮤지컬 물랑루즈 데이시트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거짓말 안 하고 개막 한 이래로, 한 20번 넘게 시도했었는데 드디어 Get ya! Tix에서 10시 정각에 맞춰서 시도했을 때도 이미 선점된 좌석이라고 튕길 때가 많았는데, 출근 하다 10시 3분에 했는데 얼떨결에 됐다.
결제 페이지 넘어가자마자 자리 어딘지도 안보고 무조건 결제부터 했는데, 로얄석 당첨! 조금 왼쪽이긴 하지만 뭐 어때 아주 맘에 들어. 보헤미안 시트(데이시트)로 정가 약 190파운드(한화 약 33만원 정도) 좌석을 30파운드(약 5만원)에 구매했습니다. 완전 럭키비키잖아. 행운의 징조가 보이는 구나. 뭐 좋은 일이 생기려나 히히.
우중충한 런던 날씨. 이 날의 온도는 21도. 어쩐지 더워 죽겠더라. 엊그저께까지 쌀쌀하더니 왜 이러는 거에요? 먹구름 잔뜩 낀 출근길, 인파도 많아서 괜히 불편. 누가 서울만큼 인구밀도 쩌는데 없다고 하던가요? 런던도 장난 없습니다.
점심으로 먹은 김치 볶음밥. 반 나눠서 도시락통에 넣어 놨다가 저녘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답니다. 다행히 퇴근길은 햇살이 짱짱하네. 빨간 버스들만 보다 새하얀 버스보니 신기하고요. 극장까지는 한 시간 안되는 거리라 시내 구경 삼아 걸어갔다.
가다가 만난 중국 음식점. 상하이 음식 전문점이라 옛날 생각 나서 반가웠다. 상호명에 이룰 성(成)이 들어가서 더 와닿았다. 예전에 수영이가 생일 선물로 본인의 성(姓)을 따서 뜻을 이루라며 동화 속 성(城) 퍼즐을 선물해 준 적이 있지. 내 친구 잘 있으려나.
살롱 전용 미용샵도 들르고. 웰라부터 로레알까지 업소 용품 많던데. 제품 당 가격이 20파운드 대로 쪼금 있는 편이다. 뿌염 해야 되는데, 염색약이 있는 밑에 층은 내려가기가 왜 이렇게 귀찮던지. 다음에 쌩쌩할 때 또 올게.
소호로 이어지는 길. 그냥 지나쳤던 데니쉬 베이커리도 들어가보고, 게임용품샵도 가보고. 성인용품샵도 가보고.
전부터 가보고 싶던 도넛집도 들르고. 쇼윈도에 비춘 화려한 도넛들 보이시죠? 참새가 방앗간 지나칠 수 있냐구요. 내 최애인 블랙포레스트가 부르는데, 안 먹어보고 베길 수 없잖아요?
단 거 섭취 진짜 줄이려고 노력 중인데, 특별한 날만 먹으려고 했는데... 오늘 특별한 날로 하지 뭐 히히. 이렇게 자꾸만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집세. 언니가 라떼에 시럽 추가 무료라고 해서 음료도 먹었다. 그래도 총 10파운드 내외로 가격도 착한 편. 도넛도 굉장히 쫄깃하고 맛있었다. 다음에 또 와야지.
며칠 전 영국의 썸머타임 적용기간이 끝났다. 그 말인 즉슨 진짜 가을이 왔고, 해 지는 시간이 훨씬 더 빨라졌다는 말이지. 오후 9시까지 환하던 하늘은 요즘 6-7시면 어두워지는 편이다.
웨스트민스터와 캠든에 걸친 런던 웨스트엔드를 걷다보면, 다양한 뮤지컬을 만날 수 있다. 레미제라블 여기서 상영하는 구나. 저건 데이시트 안 하던데, 그래도 진짜 보고싶다. 나중에 돈 벌어서 꼭 봐야지.
무려 1928년부터 운영 중인 피카딜리 극장은 이름에 걸맞게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에 위치해있다. 뮤지컬 물랑루즈 전용 상영관이며, 아르데코풍 인테리어로 유명하다.
6시 반 쯤 입장했는데, 물을 사러 잠깐 나왔다. 다시 들어갈 때도 짐 검사를 했는데, 아까 산 김치봉투를 자꾸만 보여줘야 해서 살짝 창피했다. 흐흐 뭐 한국인은 김치 없이 못 사는걸요. 두유노김치?
로열서클이라서 무대 바로 앞 일줄 알았는데, 앞에 스툴석이 있어서 살짝 위긴 했다. 그래도 전체적인 무대연출부터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던 좋은 좌석이었다.
공연 시작 약 10분 전부터 화려한 의상의 배우들이 나와서 무대 위를 걸어다닌다. 섹시한 의상을 입은 댄서들이 아슬아슬하게 봉댄스도 추는 등 오프닝부터 몰입도가 좋다. 실제로 파리 물랑루즈에서 쇼를 보고 있는 인상도 주고. 한창 유행했던 뮤지컬 시카고가 현대적인 느낌이면 물랑루즈는 조금 클래식한 느낌이다.
뮤지컬 물랑루즈 후기. 진짜 좋았다. 이건 내 인생 뮤지컬이야. 영어가 많이 늘은건지 위키드를 볼 때랑 달리 내용의 7-80%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줄거리가 단순해서 내용을 이해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고, 퍼포먼스 위주의 공연이라 영어를 못해도 어려움 없이 관람할 수 있을 듯 하다.
대부분 유명팝송들이 넘버로 등장해 공연 내내 즐거웠고, 피날레에는 관객들과 함께 춤을 추는데, 축제에 온 기분이었다. 화려한 볼 거리를 선호하는 사람들이나, 연인이나 친구끼리 보기 좋은 뮤지컬로 추천하고 싶다. 주말에 영화로도 다시 한 번 봐야지 히히.
런던에서 뮤지컬을 볼 때마다, 행복 호르몬으로 샤워하는 것 같다. 가슴에서 찬찬히 세로토닌이 벅차 오르는 것 같다고 할까?. '행복'이라는 단어에 인색한 나조차 절로 그 말을 뱉어내게 할 만큼. 이래서 내가 영국 왔지 싶고. 조금 힘들어도 버텨보자 싶고.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살까? 분명한 건 나는 ''밥''이나 ''돈''처럼 원초적인 것들로만으로는 행복해 질 수 없는 사람이다. 여기 와서 그 사실을 더욱 피부로 깨닫고 있다. 풍족한 먹거리나 두둑한 급여가 주어졌을 때 보다, 거리에서 연주되는 음악이나 이런 생생한 공연들을 볼 때 더 살아있고 행복함을 느끼니까.
적적한 나의 영국 워홀인생에 단비같은 존재들. 그 덕에 오늘도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볼 힘을 얻는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년 10월 아홉 번째 일기 (10.19~10.20)_ 고독한 영국 워홀러의 주말 (6) | 2024.10.21 |
---|---|
24년 10월 여덟 번째 일기 (10.17~10.18)_ 배를 꽉꽉 채우는 중 (7) | 2024.10.19 |
24년 10월 여섯 번 째 일기 (10.15)_ 요리왕이 되어가는 워홀러 (6) | 2024.10.16 |
24년 10월 다섯 번 째 일기 (10.13~10.14)_ 외노자의 삶이란 (17) | 2024.10.15 |
24년 10월 네 번째 일기 (10.09~10.12)_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랄까 (21) | 2024.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