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 토 [워홀+81]_ 쉬어가는 토요일은 생각이 많아집니다.
아무 일정도 없는 날. 굴소스를 발라 오븐에 닭을 구워 먹었다. 곁들일 채소가 부족하긴 하지만 다행히 먹을 게 아예 없는 상황은 아니니까. 일단 아껴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이틀만 버티면 드디어 월급 날이다.
근데 또 너무 집에만 있기는 답답해서 세인즈버리로 산책을 나왔다. 마트 좋잖아. 안전하고, 쾌적하고, 비 와도 영향 없고. 볼 거 많고.
세인즈버리 입구에 장작이 켜켜이 쌓여있길래 뭔일인가 했더니, 곧 '디왈리'란다. 흰두 달로 여덟 번째 초승달이 뜨는 날을 중심으로, 닷새동안 집과 사원 등에 불을 밝히고 신들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는 축제. 할로윈은 안챙겨도 이런건 하는 구나. 여기는 영국이지만 워낙 그네들의 힘이 쎄니 뭐...
집에 오자마자 마주친 사갈. 정신 없이 바빠서 연락이 뜸해진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친구와 파티에 갔다가 영국에 온 파키스탄 여배우를 보러간다며,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지난 번 이후로 계속 이렇게 멀어져 가는 느낌.
요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 빠져있다. 전부터 사카구치 켄타로를 좋아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세영씨가 연기를 하도 잘해서 더 빠져들었다.
그녀가 맡은 캐릭터는 타국에서 홀로 지내며 고독함을 느끼는 캐릭터인데, 극 중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한국어로 대사를 토해내는 장면에서 깊은 공감이 갔다. 쿠팡은 왜 이런 걸 안 올려주고 쓸떼없는 것 만 올리나.
외국에 살다보면 분명히 상대방이 잘못인데, 상황 상 따지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이게 문화 차이인가 의아해 하면서도, 언어적 한계로 제대로 된 입장 표명도 못하게 되는 상황. 그런데 거기서 그 문제의 원인이 내 잘못인냥 돌아가기까지하면, 정말 억울하고 서럽거든. 그게 내가 애정하는 상대로부터 온 거라면 더더욱.
근데 또 웃긴게 그 미운 상대마저도 제대로 미워하지도 못하는게 아이러니한 현실이지. 그 사람이 몇 안되는 친구나 애인 중에 유일한 옵션이니까. 인물에 대한 심리묘사나 분위기가 너무 예뻐서 도서나 드라마로 제대로 보고 싶은데, 영국이라 둘 다 할 수 있는 게 없네. 쿠팡TV는 VPN때문에 안된다고 하고, 한국도서를 받기는 힘든 상황이니.
BRP도 E-visa로 바꿔야 하고, 강매당한 세탁세제 구독 취소도 해야되는데, 마음이 그래서 그런지 여간 몸을 움직이기 실었다. 그래서 토요일 치고 일찍 잤습니다.
10.20.일 [워홀+82]_ 계속 누워있던 일요일이 저물어갑니다.
일요일까지 답을 주신다던 사장님은 밤늦도록 연락이 없으셨다. 당장 내일 근무인데 근무 일정도 안나오고, 일 한지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 근로계약서도 안 쓰고. 여기서 계속 안주하지 말라는 계시인건가. 그래도 이력서 쓰기는 너무 버겁구만.
방전된 몸 충전하는 것도 체력관리의 하나라고 위로 하면서, 미뤄둔 잡일도 사부작거려봤다. 호르몬 충만 돌 때라 누워서 그런지 느적거리게 됬다. 그래도 깨진 휴대폭 액정은 갈았다. 어제 E-visa 신청할랬더니 사진 찍어야 하는 란이 있더라고. 2년 동안 쓸 건데 대충 찍기 그래서 등록을 다음으로 미뤘다. 또 증명사진에 목숨거는 게 한국인이잖아요? 사진에서라도 이뻤으면 하는 마음.
가계부 적어보는데 CV사이트에서 지속적으로 돈을 빼가고 있었네. 16파운드씩 나가고 있었다니, 어쩐지 오늘 체크하길 잘했다. 워홀러들이여 주기적으로 카드 명세서 체크하시라. 의외로 새고 있는 돈이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밤이 다 되었다. 확실히 요즘 영국엔 밤이 빨리 찾아온다. 내가 왔을 때만 해도 9시까진 해가 쨍쨍했는데, 요즘은 금세 해가 진다. 곧 10월 27일이 되면 썸머타임이 종료되고, 한국과 시차도 9시간으로 1시간 더 늘어나겠지.
저녘 시간이 되자 윗층에서 떠들썩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사갈과 파힐이 저녘을 만드는 시간이면 대부분 저렇게 집이 떠나가도록 크게 음악을 튼다. 미트로가 찾아와서 자기네 노래를 요청하면 틀어놓고 셋이서 따라 부르기도 하고. 같은 문화권이라 그런지 통하는 것도 많아보이는 그들.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에서 더 외로워지는 나.
마음이 좀 답답해서 산책을 나왔다. 평소 같으면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그냥 참았을 텐데, 주말 내내 집에만 있었더니 여간 불편했던 모양이다. 예전이라면 혼자 나가기 무서워서 사갈한테 같이 가자고 했을텐데, 그는 이제 영 멀어진 느낌이다. 친구가 없다는 건 참 슬프구만. 매일 친구들이랑 일상을 보내던 한국에서의 날들이 그립기도 하고.
밤만 되면 리버풀 스트릿에 불 켜진 빌딩들이 보인다. 저 많은 불빛들 중에 내 자리는 하나도 없는걸까? 나도 나름 번듯한 빌딩에서 일하면서 살 때가 있었는데.
그리고 급여가 들어왔다. 월세를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다음 주 부터 새로운 업무를 맡으면 곧 형편이 나아질거라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늦은 밤이 되서야 온 사장님의 연락은 새 업무를 늘리기보단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 집중하자는 답변이었다. 2주만에 받은 답변이 고작 이거라니. 안 그래도 울적했던 기분이 먼저 말씀하셨던 제안도 사라지고 기존 업무능력까지 지적받으니 더 씁쓸해졌다. 뭐- 여기 안주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로 믿고 옮겨야지.
확실히 타지생활은 달콤하지만은 않다. 인스타로 볼 땐 예쁜 풍경에서 이국적인 생활을 즐기는 것 같겠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오롯이 홀로 해내야 되는 일도 많고, 집세나 끼니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조금 더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전처럼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눈물이 툭툭 떨어지진 않지만, 하나 둘 씩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느끼는 고독감에 종종 마음이 씁쓸해진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의 반복이겠지.
오늘 같은 시간을 보낼 때면 바쁜 일정으로 가득찼던 한국에서의 주말이 생각난다. 여기서 활동적인 주말을 보내지 않는 이유는 단지 돈이 없어서 일까, 체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함께 어울릴 사람들이 없어서 일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얼마 전 벤치에서 빵 하나만 먹어도 좋던 런던 생활에 조금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아직 뭐 완전 환멸을 느낄 정도는 아니고. 그냥 좀 고독감이 느껴진다고. 벌써 자정이 다 되어가네. 고독한 나의 주말이 이렇게 가는구나.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년 10월 열 한 번째 일기 (10.23~10.24)_ 심심한듯한 영국 워홀러의 일상 (8) | 2024.10.25 |
---|---|
24년 10월 열 번째 일기 (10.21~10.22)_ 꿀꿀한 기분을 달래 봅니다. (7) | 2024.10.24 |
24년 10월 여덟 번째 일기 (10.17~10.18)_ 배를 꽉꽉 채우는 중 (7) | 2024.10.19 |
24년 10월 일곱 번 째 일기 (10.16)_ 런던에 왔다면 뮤지컬은 필수죠 (27) | 2024.10.17 |
24년 10월 여섯 번 째 일기 (10.15)_ 요리왕이 되어가는 워홀러 (6) | 2024.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