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수 [워홀+92]_ 자꾸만 우울이 투굴이 모드 중
출근 전에 시간이 잠깐 남았다. 그냥 가긴 아쉬워서 근처를 둘러보다가 발견한 대성당. 아무도 없는 조용한 성당에 우두커니 앉아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내 아지트 발견이네, 자주 와야겠다.
요즘은 참 많은 생각이 든다. 근데 다 좋지 않은 생각들. 뭐가 이렇게 서글프고 아쉬울까 나는. 하루하루 불만만 늘어간다. 한국 가면 또 이 시간들을 그리워 할 거면서.
마침내 얼레벌레 한 달 반 만에 계약서를 썼다. 누군가가 내가 하는 일에서 부족함을 뚜렷히 보듯이, 나도 계약 과정에서 모자람이 눈에 띄게 보였다. 역시 각자 하던 일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르구나. 물론 그런 점은 입장 상 언급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말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계약서로 인해 다시금 깨닫는 내 처지가 좀 서글펐다고 할까. 그런 기분이라 음식을 받아도 신나지 않았다. 원래라면 까맣게 잊고 신나게 먹었을 텐데.
10.31.목 [워홀+ 93]_ 할로윈은 가고, 시월도 가고
영국 와서 할로윈이라 엄청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얘넨 별 감흥이 없나 보다. 크리스마스 준비는 9월부터 시작했으면서 할로윈은 미국 거라 이건가? 그래도 같은 영미권이니까 나름 뭘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 거 없는 날 이었다. 사탕 나눠줄 애들도 없고 시내에도 코스튬입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브레이크땐 수퍼바이저님이랑 센트럴에 있는 큰 부츠에 갔다. 예전에 나스 사러 다니셔서 잘 안다고, 지름길도 알려주셨다. 파스를 사러 갔는데 'Plaster'를 찾는다고 했더니, 반창고를 보여줬다. 네이버 영어 버려... 파스는 영어로 'pain relief patch'입니다! 기나긴 구경을 참다 못한 수퍼바이저님은 먼저 가시고...
올 때는 혼자 아까 지나왔던 길 복기하면서 잘 돌아왔다. 이제 생각보다 길 잘 찾잖아...? 어쩌면 나 길치 탈출했을 지도! 호호. 시간이 좀 남길래 어제 발견했던 성당에서 또 있다 왔다. 성당 너무 좋아. 조용하고 평안해지는 느낌. 절이 있으면 좋을텐데...
성당 곳곳에 이태리어 투성이고, 근처에 이탈리안 상점이 많아서 찾아보니까. 이 동네가 'Little Italy'로 불리는 이탈리안 밀집 거주지라네. 흐흐 좋다. 센트럴이랑도 가깝고, 여기 도서관도 좋고, 동네 분위기도 이탈리아도 좋은데 여기서 살면 안될까 싶었다. 스페어룸(영국 부동산 어플)으로 시세를 보고 바로 접었다. 지금 집세보다 최소한 약 1.5배 정도 더 내야 살 수 있단다. 지금 집세 내는 것도 버거워서 너무 허덕이고 있는데...
할로윈이라 그런가? 오늘은 정말이지 좀 소소한 행운이 많았다. 아침엔 어떤 분이 9파운드로 팁을 주고 가셨고- 물론 주방이랑 나누고 나니 내 앞으로 떨어진 건 2파운드 정도지만- 저녘부터는 먹을 복이 터졌는데, 식사로 삼겹살이 나왔다(보통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메뉴, 물론 내가 생각한 그런 두툼한 고기는 아니었지만).
밤에는 한 손님이 잠깐 주차가 가능하냐고 물었고, 흔쾌히 허락한 사장님에게 주차료 대신 김말이를 주문해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갔다. 약혼녀의 생일파티를 연 남자친구 손님은 케이크를 나눠주고 가셨다.
그 커플 조금 웃긴 게, 여자분도 남자분도 서로 예약전화를 하고 서프라이즈 준비를 했다. 참말로 러블리네. 사랑둥이 커플이구만. 케이크 몰래 보관해주다가 우리 냉장고 한 칸 다 비운거 아냐구요. 뭐 대신에 케이크 한 조각 얻어먹었지. 껄껄. 사실 케이크 너무 맛있어 보여서 안 주면 서운하려고 했는데, 받아서 잘 먹었다 히히. 먹을 복이 터졌다.
다들 파티라도 간 건지 손님이 없어서 일찍 퇴근했다. 영국와서 기대한 첫 할로윈이 허무하게 지나가는 구만. 집에 오는 길에 스토리 음악을 찾다가 생각났다. 오늘은 할로윈이자 시월 마지막 날이잖아. 매 년 가을 구시월쯤이면 김동규 아저씨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들으며 마무리 했는데. 올 해는 놓칠 뻔 했구만.
사실 <멋진 날>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아쉬운 하루다. 여전히 기분은 축 쳐지고, 오전엔 사장님께 업무 지적을 받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자꾸만 한국에서의 시간이 그립다. 편리한 생활과 따뜻한 사람들의 온정이 가득한 그 시간들이. 그래도 이 노래를 들으면서, 시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어느 멋진 날'로 마무리 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런 날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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