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금 [워홀+94]_ What am i supposed to do
성당을 본격적으로 다녀보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유럽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천주교를 경험해보고 싶기도 하고. 본토에서 지내는 예배는 어떠려나 궁금하기도 하고. 세례명 같은 것도 받아보고 싶고.
의자 밑에 목이 있길래 발 올려두는 곳인 줄 알았는데, 저번에 보니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도록 쿠션같은 걸 해 놓은 곳이었다. 발 올려 놨던 거 미안하네 히히.
이젠 여기도 오래 못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대리석이라 그런지 확실히 조금 춥게 느껴진달까? 그래도 갈 데 여기밖에 없는데... 이러다 자면 <플란더스 개>의 네로처럼 얼어죽겠지? 루벤스의 그림을 보다 죽은 그 불쌍한 소년이 생각나네. 자꾸만 동화 속 춥고 가련한 등장인물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내 자신이 가엽게 느껴지는 건 왜 일까?
퇴근 길 버스가 또 연착 됬다. 15분이면 갈 거리를 몇 푼 아끼겠다고 한 시간 넘게 도로에서 낭비하고 있는 나. 작잘 차려 입은 사람들 사이로 초라한 내 처지가 비교된다. 요즘 자꾸만 아킬레스건염이 심해져 종아리가 찌릿거린다. 안 아픈 구석이 없구만.
여기서 난 뭘 하는 걸까? 아까 채의 말을 듣고 자꾸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현실은 곧 지나가는 한 때라 생각하고 버텼는데, 이런 상태가 오래 가거나 이러다 끝날 수 도 있다는 사실이 조금 맥 빠지게 만들었다.
비자 만료로 출국이 가까워진 그녀는 2년 가까이 백 개도 넘는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면접 한 번 보기 힘들었다며 자조 섞인 말을 했다. 요즘 영국 현지인조차 취업이 쉽지 않을 만큼 불황이며, 그 흔한 카페조차 들어가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그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여기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건, 내 능력 부족이 아닌 환경 탓이었다며 안도감을 느껴야 했을까. 아니면 앞으로 그런 힘든 상황을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자각이라도 들었어야 했나. 어느 쪽이든 자꾸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무기력하고 우울해진다.
11.02.토 [워홀+95]_ 여러분의 사랑을 먹고 삽니다
이상하게 심지나 수영이랑 통화를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엄청난 위로 같은 말보다 정말 시시콜콜한 대화나 시비 터는일이 많은 데도 말이다.
아침엔 또 날 기억해주는 이들과 함께했지. 어제 새벽부터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방해금지모드 때문에 전화를 못 받았네. 대신 이렇게 또 영혼참석을 하는구만. 하튼 내 자리를 늘 챙겨주는 사람들 늘 고맙습니다. 여러분들덕에 힘을 내고 살아요.
저녘엔 마스크 나눔 받으러 출발. 일하는 데서 청소할 때마다 바닥청소용액때문에 목이 너무 따갑다. 그거 분명 락스 성분일텐데... 거기에 뜨거운 물 부으면 유독 가스 나오는 사실을 모를까...? 이러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처럼 되는 거 아닌가 걱정돼서 가지러 왔는데, 기체는 소용없다네.
그래도 약속했으니 다녀왔다. 정말 마스크를 한 아름 가득 주셨는데, 유통기한이 다 지나있었다...흑 내 버스비... 그래도 뭐 가면서 런던 시내 야경도 구경하고 좋았지 뭐...
그래도 타지에서 받는 도움은 고마웠다. 목이 아프다고 얘기했을 때 모두가 한 마음으로 걱정해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모습이 참 따뜻했다. 나는 정말 정서적 지지가 중요한 사람이구나. 그래요 나는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11.03.일 [워홀+96]_Garden Volunteering
오늘은 정원 자원봉사 첫 날. 지난 번 지원했던 역 앞 공터를 엎고 정원으로 만드는 활동인데, 식물을 심어보고 싶기도 했고 사람들도 만나보고 싶어서 시작해봤다. 근데 한 두 시간 하는 줄 알았는데 5시간을 하는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래도 다 못 끝냈다.
처음 할 땐 재밌었는데 한 시간 지나니 무릎 아프고 다리 땡기고 집 가고 싶었다. 그것도 무릎 구부리기 싫어서 삽질 시작했는데, 허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좀 웃긴 게 일도 하는 사람만 하고 안 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얘네는 그럼 여기 왜 온 걸까? 뭐 봉사활동 점수 같은 게 필요한가...?
조금 웃긴 게 이 많은 자원봉사자들 중 무슬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거리에 깔리고 깔린 게 무슬림인데... 걔넨 이런 거 관심 없나? 하튼 무슬림만 사는 줄 알았던 우리 동네에도 나름 영국사람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방글라데시어나 인도, 파키스탄어만 듣다가 브리티쉬 잉글리쉬 들으니 너무 반갑잖아. 귀 쫑긋 세우고 옆에서 말하는 거 열심히 듣고, 없는 용기 쥐어짜내서 말해보려고 조금은 노력했다. 뭐 완전 말이 잘 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했던 것 보다 어느 정도 커뮤니케이션은 됐다.
일도 이게 맞나 쭈뼛쭈뼛하면서 열심히 했다. IT쪽에서 일하는 아서랑 손 발을 맞춰서 잡초도 다 골라내고, 짐도 옮기고, 모임회장인 자이드랑 비둘기 방지용 리본도 달았다. 나중엔 자이드보다 내가 훨씬 더 일을 잘했다. 이게 뭐라고 또 성취감이 느껴졌다. 요즘 맨날 식당에서 실수하기도 하고 자존감 바닥치고 있었는데 흐흐.
쨋든 뭐 나름 재밌었다.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흙도 만졌더니 계속 느껴졌던 우울함이 좀 사라진 것 같았다. 이 지역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기도하고. 아니 근데 이 정도 양이면 진짜 사람 썼어야 된다. 타워햄리츠의 세금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끝나고 세인즈버리가서 장 봐서 돌아오는데 자이드를 또 만났다. 먼저 인사하는데 못 알아봐서 미안할 뻔 했네. 히히. 다음 주에 또 온다니까 엄청 좋아했다... 그치만 또 5시간이라면...난 도망 갈거야....
집 와서는 방 청소를 하고 뭘 좀 만들어 먹었다. 오늘 먹은 거라곤 밀크티 반 컵과 미니도넛 한 개였는걸. 정말 글자 그대로 자원봉사였다. 그래서 첫 끼이자 마지막 끼니를 대충 챙겨 먹었다.
무릎 시렵고 다리 아파서 아무 것도 안하려고 했는데, 윗층에 이사 온 라이언이 혼자 짐을 옮기고 있었다. 진짜 계단 오르내리는 거 절대 안하려고 했는데, 혼자 뿌시럭거리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모하메드가 나가고 들어온 라이언은 영어를 굉장히 잘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마 복식호흡과 함께 영어를 해서 그런 것같다. 인스타교환하자고해서 봤는데 노래 진짜 잘하더라. 할로윈 파티도 즐겼다고 주말에 같이 놀러가자해서 또 고맙다하고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옆방에 새로들어온 파딘과 파슈도 유쾌하고 즐거운 친구들인 것 같다. 많이 도와주려고 하고 뭐 아직까지는? 히히.
암튼 이번 주도 쉬는 듯하면서 일기 쓰고 보니 열심히 살았네. 그러니까 이력서 지원은 내일부터 진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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