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토 [워홀+109]_내 생애 첫 파티
식당 일을 하다보면 가끔 손님들이 놓고 간 음식들이 남는다. 엊그저께 그렇게 남은 맥주가 생겨서, 비어캔 맥주를 만들어봤다. 이름은 엄청 쉽고 근사해보였는데 그 결과는 결코 쉽지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부어서 닭에서 맥주 냄새가 너무 많이 났다. 잡내를 없애려다 과한 술 내 덕에 안 먹고 싶었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냥 먹었다.
런던에서 버스를 선호하지 않지만, 또 런던만큼 버스가 다니기 좋은 곳이 있을까. 연착과 교통체증만 없다면. 특히 예쁜 장식이 가득한 센트럴(시내)거리를 지나갈 때면. 마치 놀이공원의 테마파크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떠날 땐 귀찮아도 꼭 이층까지 올라간다.
2층에서는 스페인 여행객들을 만났는데, 옆에 앉은 나를 개의치 않고 사진을 찍어 대길래 그냥 자리를 비켜줬다. 어쩌면 기분 나쁠 수 있는 그 행동들이 이 날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단란해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 없이 즐거워 보이는 그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하차 하기 전에는 사진까지 찍어줬다. 대로변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 미소는 한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저녘은 라이언이 소개시켜준 한국 밋업에 갔다. 밋업은 공통 관심사를 갖고 정기적 만남을 갖는 일종의 동호회인데, 성언니가 영어실력 늘리기 좋다고 추천해 준 적 있었다. 그치만 유료라고 해서 하려다 말았지.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을 사랑하는 모임> 정도 되는 이 커뮤니티는 라이언의 친구 크리스와 제임스가 호스트인데, 그가 현재 코펜하겐에 있는 관계로 나 혼자 참석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낯가림이 심한데 혼자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뭐 인생은 실전이니까. 라고 말해놓고 사실은 토할 것 같다고 엄청 징징거렸다.
약속시간에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덕에, 2층에 앉아서 손님 무리들을 지켜봤다. 라이언이 호스트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않은 탓에 한국인을 찾아헤맸는데 잘 안보였다. 마치 잠복근무에 나선 형사가 된 기분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호스트 크리스는 영국인이었다.
이 그룹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쿨내 폴폴 나는 크리스부터 에르메스백을 들고 고급 스카프로 멋을 낸 중년의 영국 여성(맥고나걸 교수님 느낌), 흑백요리사를 좋아하는 진저보이, 영국액센트가 매력적인 인도네시안-브리티쉬 조,귀여운 필러워드를 연발하는 포항에서 살았다는 홍콩 여자아이까지.
유럽이나 미국 등 서양 사회에서 한류는 주류 문화가 아니며,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소외됐거나 오타쿠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는데- 내가 겪어본 현실에선 아닌 것 같다. 일하는 곳에서 느낀 것도 마찬가지였고. 대개 깔끔하고 단정한- 평범한 사람들도 한국을 좋아하고 우리 문화를 즐기고 있는 걸.
그치만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다가와주진 않았다. 라이언이 내가 한국인이라 가면 인기 많을 거라고 했는데... 모임에 참석했던 다른 네 명의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고. 신입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챙겨주던 내가 겪던 한국의 동호회 문화와는 많이 달랐다.
음주가무와 사교파티에 대한 환상이 있던 나는 파티애니멀(파티광)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그와 반대로...<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스몰토크조차 어려운 한국사람에게 서투른 영어로 먼저 가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이어가고,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막차 핑계를 대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조금 현타가 왔다. 그래도 앞으로는 더욱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알바 하나도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받는, 이곳에서는 이런 네트워킹이 필수니까. 뭐 경험을 해본 게 어디야. 다음 번엔 더 잘해봐야지.
11.17.일 [워홀+110]_김또술
오늘은 정말 술도 안 먹고 이력서를 쓰며 건강하게 하루를 보내려 했지만, 파딘이 아침 선물로 코로나를 주고 갔다. 그래도 이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세르지오가 날이 너무 좋다고 산책이나 하자고 연락이 왔다. 근무가 일찍 끝났는데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만나면 또 돈 쓸 것 같아서 힘들 것 같다고 말했는데, 계속 거절하기가 좀 그랬다.
한국이 어딜 들어가도 예쁜 카페로 즐비한 곳이라면, 영국은 어딜 들어가도 멋진 펍이 즐비한 곳 같다. 맥주맛도 확실히 깔끔하고 깊어서 맛있고.
런던에는 게일즈 베이커리라는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있는데, 한번 쯤 가보고 싶었지만 가격대가 있어서 좀처럼 시도해보지 못했다. 투굿투고에 있길래 한번 시도해봤는데, 픽업시간을 착각해서 한 시간 더 기다려야했다. 그냥 취소하려고 했는데 세르지오가 그러지말라고 그냥 근처를 좀 더 돌자고 해서 다시 바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 얻어먹기는 뭐해서 내가 샀다. 아- 정말 나오면 다 돈이구나. 월급날까지 긴축정책 유지해야하는데. 소셜라이징을 안 할 수도 없고.
여기선 뮬 와인을 먹어봤는데, 세르지오말로는 크리스마스 한정 시즌음료라고 겨울이 되면 꼭 먹어봐야 한댔다. 맛은 뱅쇼랑 비슷했는데 조금 덜 달았다. 가니쉬로 올려진 오렌지가 엄청 통통해보여서 먹고 싶었는데 포크가 없어서 못 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받은 게일즈 투굿투고. 구성은 나쁘지 않았는데 다시 또 이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바게트, 샐러드 두 개와 시나몬 페스츄리를 받았는데 만족도가 높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냥 돈 좀 더 내고 내가 먹고 싶은 걸 골라야겠어.
집에 왔는데 약간 심심해서 아침에 받은 코로나를 먹었다. 그런데 파딘이 저녘 먹으러 올라와서 바에서 받았다고 와인을 줬다. 그래서 또 한잔하고. 더 마실거냐고 물어서 생미구엘도 줘서 또 한잔하고.
와 오늘 맥주만 한 10병 넘게 마시는 것 같다. 웃긴 건 처음 바에서 마시고는 살짝 알딸딸했는데, 좀 지나고 나니 이제 취하지도 않는 것 같다. 화장실도 별로 안 가고 싶고. 확실히 유럽 맥주는 좀 다른 것 같다.
방에 등이 나가서 키친에서 노트북으로 일기를 썼다. 파딘이 한 잔 더 하재서 같이 맥주 한 잔 더 했는데, 사원에서 돌아온 쇼룹이 주방에선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 웃기는 자식이야. 아까 사갈이랑 셋이 있을 땐 암말도 안하더니. 지가 안 마시는 거지 왜 남들도 못 마시게 하는거야. 담배처럼 냄새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중에 취해서 고성방가한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쨋든 이번 주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다. 맥주독에 빠져 살았다고 할만큼 많이 먹었다. 그렇다고 엄청 취한 건 아닌데. 퇴근 후 가볍게 하는 맥주 한 잔이 좋다던 주희가 생각났다. 주희도 스페인 살면서 갖게 된 습관인가.
한국처럼 죽자 살자 내일 없이 곤드레만드레 마시는 건 아니지만, 장소를 옮겨가며 가볍게 계속 술을 먹는 문화라 술 값이 많이 드는 것 같다. 물론 대화도 하고 네트워킹도 하는데 필요하니까 안 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조금은 줄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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