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5.수 [워홀+218]_다시 한국에서 영국으로
이번 출국 길은 아빠가 함께 했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올드 팝송에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다. 옛날 노래를 들으니 어렸을 때 아빠랑 이런 옛날 노래를 들으며 놀러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 때랑 한 참이나 달라져버린 현실이 조금 야속하고 서글펐다.
나는 아직도 아빠 차 뒷 좌석에 누워서 꼼지락 대던 6살 같은데. 그 꼬마애는 벌써 마흔을 앞 두고 있었다. 가족들을 데리고 놀러 다니던 그 청년이 가운데 머리가 빠져버린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처럼.
달리는 차 안. 우리 부녀는 굉장히 오랜만에 속에 있는 얘기를 터놓았다. 그 얘기를 통해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난리를 쳐도 그게 가족인가 보다.
철 없는 아빠는 출국장에 나를 데려다주는 대신, 주차장에 본인을 데려다 달라고 했다. 깔깔. 여전히 웃기는 우리 아빠. 그런 아빠를 뒤로 하고 탑승동으로 향했다. 일찍 나온 김에 면세점 구경도 하고, 마지막 한 끼도 든든히 먹고.
입국길은 아시아나 항공 OZ521편을 탑승했다. 미리 비상구 좌석을 선택한 덕에, 혼자서 세 명분 자리를 여유롭게 쓸 수 있었다. 누워봤는데 편히 누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다리는 뻗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됐다. 비지니스도 아니고 이코노미에서 이 정도 공간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어디야.
- 평점
- -
- 감독
- 토드 필립스
- 출연
- 호아킨 피닉스, 레이디 가가, 브렌단 글리슨, 캐서린 키너, 재지 비츠, 스티브 쿠간, 해리 로티, 리 길, 켄 렁, 제이콥 로플랜드
정신없이 한국으로 갈 때랑 달리, 이번 비행길은 좀 여유를 부려보고 싶어서 영화를 틀었다. 그런데 너무 졸려서 자꾸 보다가 졸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완전 망했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인지 별 기대가 크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비행기에서 뭘 좀 하려고 했는데, 하나도 못했다. 뒤 바뀐 시차 때문인지, 며칠 간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인지 계속 잠만 잤다. 눈 떠보니 3시간 남은 거 실화냐구요.
입국하자 마자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라피는 도착한 지 1시간이 지나 서야 만날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땐 기뻤는데, 공항까지 아직도 한 첨 걸어야 한다는 말에 좀 짜증이 났다.
그가 타고 있던 버스가 중간에 운행을 멈춰서 걸어야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나는 몇 푼을 아끼겠다고 그가 진짜로 걸어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알고 보니 버스기사가 근무 시간이 끝났다고 운행을 중단한 탓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비행 시간 지연으로 1시간 늦게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입국장에 그가 없다는 사실이 못 내 서운하고 조금 화가 났다. 한국에서 2시간 넘게 나를 기다리던 엄마와 비교 돼서였을까?
생각해보면 그 멀리 까지 와준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누군가 나를 마중 나와준 것 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수업이 있는 날임에도, 넉넉치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오려고 했던 그 점을 봐줬어야 했는데.
근데 오는 길엔 쌤쌤이 됐다. 깔깔. 내가 지도를 잘 못 봐서 길을 헤매는 바람에 우리 둘은 50키로가 가까이 되는 캐리어를 들고 헤맸다. 평소라면 10분이면 갈 길을, 1시간이 다 돼 서야 도착한 것이다. 아까 불 같이 짜증 내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나는 순한 양 마냥 변해서 라피의 눈치를 봤다. 그래도 승질 한 번 안 내던 녀석, 껄껄. 이런 게 사랑이구만~
사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랑 비교하면,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우선 이동하는 길이 편했다. 아빠 덕에 짐도 전보다 잘 쌌고, 그 짐도 라피가 대부분 다 들어줬고, 아무것도 몰라서 초조하고 두려웠던 영국이 이제는 제법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졌으니까.
무엇보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던 그 때의 나 와 달리, 지금의 나는 런던에 물리적, 정서적 기반을 두고 있다. 한국을 그리워 하던 나. 왠지- 이제는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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