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1. 금
첫 두 판 까지는 괜찮았는데, 세 판째부터 갑자기 가슴이 웅웅 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그냥 하던 스파링인데, 갑자기 시합도 이렇게 진행될 생각을 하니 마구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띵하고 토할 것 같았다. 이런, 아직도 나는 유리멘탈이구나.
관장님이 한 체급 올려서 나가는 게 좋다고 하셨다. C와 G를 밑 체급으로 넣어서 그 위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참가자 중엔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을 것 같다고 한다. 체급도 비슷한데 어린애들이니 더 혈기 왕성하겠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젊음은 없지만 원숙함을 갖고 싸워보겠어. 난 현명하게 게임을 풀어갈 거야. 방금까지 무섭고 토할 것 같다던 사람이 해보는 다짐.
스파링을 일부러 낮은 그랄이랑 붙여주시는 것 같은데, 누굴 만나 든 지치고 힘 달렸다. 잘할 수 있을까 나는... 한두 게임만 뛰어도 이렇게 죽을 것 같은데, 시합은 어떡하지. 5분씩 네 판을 풀로 뛸 수 있을까? 첫 판 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랄은 내가 제일 많았으면 좋겠다. 뭐가 됐든, 한 판만 이겨보고 싶다. 진짜 한 판만 제발.
잠깐 쉬는 동안 거울을 보니 눈밑이 퀭하고 입술이 파란 내 모습이 비친다. 이기기 위해 영혼도 팔 것 같은 필사적인 몸부림, 그다음의 널부러진 나. 문득 차차의 말이 생각났다. 승부에만 집착하면 이길 것도 못 이긴다고. 승패가 아니라 본인이 하는 거에 집중하라고.
헤드폰이 없어서 체육관에 다시 갔다. 체육관에 없길래 집에 돌아와서 구석구석 뒤졌더니, 빨래 바구니 속 도복 안에서 헤드폰이 나왔다.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더니. 날은 왜 이렇게 더운 건지. 어제는 약간 쌀쌀해서 진짜 가을이구나 싶었는데, 아직 끝자락이긴 해도 여름인가 보다.
09.02. 토
7시에 눈 번쩍! 주말은 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게 되는 걸까? 좀 느적 대다 병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다. 치료사 선생님네 아들은 요즘 야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1년 동안 수영도 해보고 축구도 해보고 꿈 많은 아이. 넌 참 사랑받고 빛나며 살고 있구나.
치료가 끝나고 스벅으로 갔다. 기프티콘도 써야 하고 일할 것도 많아서 갔는데, 일은 생각보다 많이 못했다. 그 와중에 또 블로그 쓰려고 아놀드 홍 레시피 말차크림프라푸치노를 먹었다. 하나만 먹었는데 진짜 배부르더라. 12시에 올리브영 쿠폰 받았는데 역시 오프라인 구매가 할인을 더 많이 해줘서 매장으로 갔다. 운동일기 다 쓰고 카페에서 나오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애기들도 울고 해서 집중이 안됬었다.
우리 동네 올영 매장은 너무 재고가 없다. 할 수 없이 그냥 다른 걸로 대체해서 샀다. 태블릿이 너무 무거워서 그런지 어제 스파링 여파인지 팔은 아픈데, 나온 김에 볼일을 다 봐야 해서 다이소도 들렀다.
집에 돌아와서 좀 쉬다가 밀린 운동일기 삼일 치랑 포스팅을 썼다. 너무 심심해서 나가고 싶었는데, 관장님이 다음 주는 매일 나와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쉬자. 쉬어야 해 다음 주에 뛰려면.
09.03. 일
아무도 없는 일요일 오전. 간만에 목욕하려고 욕조를 청소했다. 마개가 없어서 대충 사이즈 비슷한 그릇으로 덮어놨다. 어제 다이소에서 살 걸. 다이소 가면 꼭 살 거 생각 안 나서 이상한 거 잔뜩 사 오는데, 집 오면 살 거 수두룩 생각난다. 수도꼭지도 고장 나서 샤워기를 고정시켜 물을 받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부잣집 영애 아가씨에게 집사가 따뜻한 목욕을 제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음식도 준비하고 목욕물을 받았다.
인스타 감성샷을 찍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전에 사놨던 입욕제를 풀고 나니 김국 같았다. 그리고 그릇이 잘 안 맞아서 물이 계속 빠져나갔다. 반강제 반신욕. 대강 놀다가 끝내고 다시 청소하는데 세제함에서 마개가 보였다.
그렇게 찾아도 안 나오던 욕탕 마개, 물 다 빼고 나니까 나오는 건 뭔데... 정말 금요일부터 계속 찾고 발견하기의 반복이구만. 그래도 뭐 늦게라도 찾았으니 어디야. 세탁세제로 미끄덩했던 베란다 청소도 하고 3시까지 누워있다가 다시 일어났다. 물도 끓이고 밥하고 청소하고. 여유 있는 주말을 꿈꿨는데 너무 무료하고 심심했다. 다음 주엔 꼭 약속 잡아서 밖으로 나가리.
09.04. 월
오늘은 면데이였다. 점심엔 칼국수 먹고 저녁엔 짜장면 먹고. 간식으로 단수이 대왕 카스텔라도 먹었다. 지금 몸을 열어보면 90%는 밀가루일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지는 시기면 유독 바지락 칼국수가 땡긴다. 아마 탄수화물에 철분까지 들어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한 명씩 오는 사람들을 보고 식당 사장님이 점심엔 혼자는 안된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사장님 여기 장사 잘되는 건 알지만, 너무 얄팍하게 굴지 맙시다. 친구 없는 사람도 바지락 칼국수 먹을 수 있죠.
벌써 계절이 바뀌고 있나 보다. 가을이 온 건 잘 모르겠지만, 일몰이 전보다 훨씬 빨라진 건 알겠다. 체육관 갈 때 보던 하늘에 언제부턴가 석양은 사라지고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렸다. 또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구나.
오늘은 두 타임을 했다. 몸 생각해서 한 타임만 하려고 했는데, 전 타임을 하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나랑 비슷한 체급의 남자애랑 스파링을 했는데, 정말이지 쪽도 못썼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친구 같았는데, 트라이앵글하나 제대로 못 걸었다. 휴. 수업 끝나고 물을 마시는데 정수기 앞에서 집에 가냐는 질문에 다른 남자분이 말했다. "한 타임 더 해야죠. 실력이 부족하니."
그래, 실력이 부족한데 깡도 없는 수진아. 어딜 가니. 그런데 정말 전보다 체력이 많이 줄었다. 스트레칭할 때부터 이미 기운이 없었다. 집에 와서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발바닥에 가시도 박혔는데 잘 보이지도 않고, 발가락도 아팠다. 아까 살짝 꺾인 느낌이긴 했는데 생각보다 꽤 오래갈 것 같다. 이제 하다 하다 발까지 아프다 정말. 우리 몸엔 아플 수 있는 관절이 이렇게 많구나.
은진이는 나한테 지금 필요한 건 필라테스 같다고 동네에 잘 아는 곳을 소개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살면서 필요한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했다.
09.05. 화
엄지 발가락. 생각보다 아프다. 걸을 때 마다 찌릿찌릿 거린다. 뒤꿈치 가시 빼기 정말 힘들다. 오른발은 목발이라도 짚고 다닐까. 이번 주 지나면 진짜 푹 쉰다.
배달음식 대신 간장계란비빔밥을 먹었다. 엄청 신선하고 건강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배달음식보단 낫겠다 싶었다. 귀찮더라도 열심히 사는 J를 보니 나도 조금은 부지런을 떨어야겠다 싶었다.
수업 시간. G를 다치게 했다. 파트너가 부상을 입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괜찮다며 나를 달랬지만 나는 안다. 무릎은 쉽게 나을 수 없다는 걸.
09.06. 수
아침에 일어났는데 온몸이 뻐근하고 삭신이 쑤셨다. 오늘은 진짜 쉴까? 아냐 이번주만 버티자... 또 내 자신을 달랬다. 다른 사람들도 다 아파도 참고하는데. 나만 또 도망칠순 없지.
하기로 결정했으면 끝까지 하자. 고민의 고민이 또 이루어지는 하루. 이런 과정을 얼마나 많이 거쳐야 초연해질 수 있는 걸까. G가 보이지 않았다. 연락해보니 상태를 좀 봐야할 것 같다고 한다. 나 때문인가 마음이 불편하다.
09.07.목
왼쪽 발등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제 팔꿈치 손목 제외하고는 온 관절에 통증이 생겼다. 하도 초크를 당해서 턱마저 아프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성한 데가 없는데, 어제 G도 다치게 해서 수업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지... 얼마 안남았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금요일까진 가야지. 미라처럼 테이프로 온 몸을 칭칭감고 수업에 갔다. 선수들은 이런 과정을 계속 거치는 걸까? 더 대단스러워보이는 그들.
오늘은 S가 다쳤다. 스파링 중 목이 살짝 꺾인 모양이었다. 무릎이 살짝 꺾여서 경기를 중단한 사람도 있었다. 정말 이번 주는 부상자가 낙엽처럼 쌓이네. 시합주는 많이 다치는구나.
부상당한 S와 G는 나보다 그랄만 낮을 뿐 훨씬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이다. 못나가게 되면 내가 다 아쉬울 것 같다. 잘하는 사람이 경기를 하는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경기를 하는건가. 이래서 사람들이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고 하는건가.
수업 마지막에 관장님이 "온 관절이 아플 테지만, 그래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정도는 연습해야 시합에 나갈 수 있다고 덧붙이시면서, 역치를 키워야만 강해질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 강해지고 있는 중일까?
09.08.금
일어났더니 팔꿈치가 쑤신다. 어제 팔꿈치빼고 아프다고 하자마자. 등도 아프다. 거울을 보니 눈 주변 실핏줄이 터져서 팬더처럼 퀭하다. 어제 초크 때문인가. 진짜 죽을 것 같긴하더라.
평소보다 더 잘 먹고 체중은 점점 올라가는데 나는 어딘가 맥아리없고 아파보인다. 오늘만 버티면 된다. 일찍가서 두 타임 태워야지. 아침에 패치 붙이러 수선집 갔더니 문이 닫혀있었다. 쩔수없다. 그냥 들어갈 수는 없잖아? 꽈배기랑 고로케 사서 들어왔다.
아 그런데 사장님아 패치를 너무 아래에다 달아주신듯 ㅠ 뭐 입으면 느낌 다를 수도 있지만. 팀 로고 정말 내 스타일 아니라 안붙이고 싶었는데 시합이라 달았다. 나의 소속팀이라... 기분 좀 이상하기도 하고.
집에 와보니 고던 선물이 와있었다. 으유 이 요망항 것. 언제나 진심을 담은 편지는 사람을 감동시키네. <Hello Beautiful>이라니. 제품명이 뭐 이리 달달하담. 그런데 향은 너무 쎄서 스윗피로 바꿨다. 애플비네거젤리는 생각보다 그냥 그랬다. 올리브영에서 제 값 주고 샀으면 돈 아까워 죽었을 뻔. 그래도 헐리웃스타들의 필수품이라니 먹어봐야지.
수업에 갔는데 G가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니 더 상대를 몰아붙이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같이하던 파트너들마다 살살하자는 말을 했다. 너무 쌈닭같이 다녀서인지 관장님도 스파링에 거의 내보내지 않았다.
수업 끝. 자신없는 사람은 내일도 나와야된다고 하셔서 고민됬는데, 진료시간이랑 겹쳐서 병원에 가기로했다. 왜 아프냐. 나는.
09.09.토
신경손상. 엄지 발가락의 통증 원인이었다. 의사 선생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을 때는 사실 많이 쫄렸다. 곧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사실 그냥 그러기를 바랬지. 어차피 멈출 생각은 없었는데 맘만 흔들릴까 싶어서 진료를 미루다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 발 엑스레이도 찍어봤다. 발등 뼈가 크게 2-3개로 나뉘어져 있어서 쉽게 피로할 수 있으니 이것도 조심하란다. 끽해야 발가락에 깁스정도나 할 줄 알았는데. 이제 인대를 넘어서 신경까지. 정말 풍부한 환자 커리어 납셨다.
내일 시합인데 하루만 더 안되겠냐 묻는 내게 의사선생님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럼 첫 판에 지고 쉬라고 하셨다. 감사합니다. 지면 실력부족이 아니라 그냥 선생님 말 잘들은 사람으로 칠게요.
담담하게 진료실을 나와서 물리치료를 받으려고 누웠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부상만 늘고 실력은 쥐뿔만큼도 향상 없는 비루한 내게 화가나서. 다음주 일정 정한 거 뭐뭐있지? 엄마랑 심지한테는 또 뭐라고하지? 지겹다 이런 거.그냥 다 때려치고 싶었다.
조용한 병실에서 숨을 죽이고 흐느꼈다. 커텐과 기계음이 이 볼썽 사나운 모습을 가려줄거라 믿으면서.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나니 좀 차분해졌다. 역시 짜증나고 슬플 때는 그냥 눈물로 흘려버리는 것도 나쁘지않다.
미룽씨는 2시간이나 걸려서 우리 동네에 와줬다. 그리고 밥도 사줬다. 참나...참나 정말... 너는 진짜 감동 생성기냐고... 도대체 이런 무한동력기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정말 이런 애를 친구로 두고 복이 많은 사람이야. 또 기분이 좋아져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헤실거리면서 웃었다. 참 나란사람은 격정 드라마에서 청춘무비로 오르락 내리락 재밌군.
역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오는데 너무 힘들어서 버스를 타려고 했다. 그런데 역에서 집까지 다니던 버스가 사라졌다. 휴. 아쉽네. 어쩔 수 없이 걸어가는데 발가락이 꿈찔거렸다. 무릎도 힘이 풀려서 터벅 터벅 걷게 됬다. 제발 나 좀 신경써주란듯이. 아까 친구랑 있을 땐 괜찮았는데. 알겠다 알겠어. 내일까지만 버텨라.
집에 와서 약을 먹었다. 무릎 약, 발 약 기타 등등. 요즘 내 몸의 반은 약이지 않을까? 이 상태로 몸을 반 가르면 알약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상상을 해봤다. 너무 졸립고 피곤해서 자고 싶었는데 약 먹고 바로 자면 속에 안좋을 것 같아서 버티다보니 또 너무 잠이 안왔다. 내일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참나. 이젠 뭐 하늘에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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