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3.토_집 구하기는 너무 어려워
새벽까지 나와서 빨래를 했건만, 10분 차이로 건조기를 뺏겼다. 근데 뺏긴 사람이 전에 내 빨래 건조기에 돌려준 그 영국 여자애였다. 참나 쩔 수 없지 어서 쓰소서.
어제 본 유스턴역 근처 집주인과 계약을 하기러 했지만, 혹시나 몰라서 뷰잉을 더 보러 나왔다. 세번째 뷰잉한 집은 계단이 꽤 가파르고 8명이 생활해야하지만, 시설이 아주 깨끗하고 좋은 편이었다. 무슬림사원 근처라 중동인들이 많은 건 조금 낯선 경험이었지만, 근처에 마트도 많고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 대안으로 챙겨두지뭐.
세 번째 뷰잉은 취소당했다. 동료에게 긴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 다시 올 수 있냐는 그의 전화에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뭐-오늘 보러 온 집 근처라 나도 크게 시간낭비 한 건 아니니 괜찮다.
- 이스트모스크사원
아침을 안 먹었더니 너무 배가 고파서 앨더게이트 근처 중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앞치마 대신 냅킨으로 옷을 가리고 먹자 직원이 티슈를 하나 더 가져다 주었다. 이런 친절함 중국인에서 보기 쉽지 않은데. 엄마랑 같은 또래의 직원이라 괜히 엄마 생각이 나서 괜히 맘이 찡했다.
구글리뷰평점이 높은 곳이라고 해서 찾아갔는데, 비교적 친절하고 깔끔한 곳이었다. 고기도 꽤 맛있었다. 딤섬도 새우육즙이 입안에 꽉 찰 정도로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단단국수 지도
앨더게이트 근처 굿맨스 필드는 정말 좋아보였다. 깔끔한 외관과 멀리서 봐도 좋아보이는 내부. 멋드러진 인테리어까지, 이런 집은 얼마일까 궁금했더니 한 달 렌트비가 300만원 정도였다.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증권가 고액연봉자들이려나? 삼성같은 재벌집 손자들?
마지막 뷰잉은 정말 졸려 죽는 줄 알았다. 너무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아서 결국 길가에 주저 앉았다. 그런데 중개인이 30분 정도 늦어서 좀 짜증이 났는데, 얼굴을 보고 풀렸다 호호. 전형적인 중동미남이었다. 이목구비가 적당히 뚜렷해서 부담스럽지 않고 키도 크고, 그래 사람이 좀 늦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집은 정말 보기 쉽지 않았다. 잘생긴 그 중동남은 공동현관문키까지 가져오지 않았다...건물 안의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인터폰을 했지만 아무도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건물에서 사람들이 나오면서 우리는 약 한 시간만에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참고로 같이 뷰잉온 여자애는 기다리다가 늦었다며 다른 뷰잉을 보러 가버렸다.
집은 나쁘지 않았다. 엘레베이터도 있고, 그런데 위치가 좀 별로였다. E2쪽이라 시내로 가려면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하고, 버스정류장과 집 사이도 거리가 꽤 됬다. 앞에 중학교도 있던데 분위기도 그리 밝지만은 않아서 조금 꺼려지지만, 하나의 옵션으로 놔둬야지.
숙소로 돌아와서 찾아낸 반지. 마음이 좀 외로워서 오대산 친구들과 맞췄던 반지를 꼈는데, 잠시 바지에 넣어둔 게 사라져서 세탁실부터 화장실까지 다 뒤졌다. 다행히 침대 밑에 떨어져있더라. 먼지가 좀 묻긴했지만 그래도 다시 찾아서 다행이다. 내가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만 또 찾기도 잘하거든.
저녘에 유스턴쪽 루마니아 랜드로드에게서 전화가 왔다. 분명 뷰잉 때 대리인에게 직업이 없어서 곧 구할거라고 말했는데, 그는 전달받지 못한 모양이다(아니면 그 때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거나). 잡이 없는 사람에겐 렌트를 해주기 힘들다고 6개월치를 선불로 내는게 관례라고 했다.
6개월치를 지불하겠다고 하자 그는 못 미더운지 3개월치 집세를 선불로 내고, 1개월치 집세는 보증금으로 갖고 있겠다고 했다. 대신 3개월 동안 잡을 구하지 못하면 최소 계약기간인 6개월을 채우지 못했기때문에 돈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뭐 거기까진 좋았다. 내가 신원이 불분명한 외국인이니, 그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주의사항을 얘기하면서 조금 도를 넘기 시작했다. 자기는 일이 없이 집에 종일 있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그런데도 널 받아주는 거라고 말했다. 아니-그럼 왜 렌트를 하질 말아야지, 그리고 절대 누구도 집에 데려와선 안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친구도 없기때문에 알겠다고 대답했는데, 그는 노프렌 네버에버라며 연신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며 너 지금 누구랑 있냐-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거냐고 나를 다그쳤다. 여러 명이 묵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어서 그렇다고, 네가 원하면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소리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와 계약을 해서 다음주 쯤 나갈 계획에 원래는 2주치 예약했던 숙소를 1주일치로 변경했다. 하지만 이러다 계약이 깨질까 싶어 혹시 하루 앞당겨줄 수 있냐고 물었다. 직업이 없다는 말에 돌변한 그가 계약 시에는 무엇을 꼬투리로 잡아 돌변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는 단칼에 거절하며, 본인의 대리인이 바빠서 그 날 몇 시간안에 계약과 입금을 모두 진행 할 것을 요구했다. 본인은 현재 휴가 중이라, 본인의 대리인이 대신 계약서 작성을 진행 할 건데, 그녀가 유명한 저널리스트이고 매우 바쁜 사람임을 수차례 강조했다. 세입자가 외국인에 무직자라는 걸 알게 되자 그는 더 이상 이 계약을 진행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사실 이걸 그냥 좋게 말해도 되는데 매 번 " 리쓴 킴, 리쓴- 리쓴-"하면 연신 소리를 질러대거나 한숨섞인 어조로 성질을 내는 바람에 기가 팍 죽어버리기 일 수 였다. 안 그래도 되지 않는 영어가 더 안 나왔다.
부동산 없이 사기일까봐 걱정도 되고, 4개월치 월세를 선납하면 정말 남는 돈이 거의 없는데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강압적인 랜드로드랑 잘 지낼 수 있을지- 계약이 하루 아침에 엎어지고 거리에 나앉게 될까봐 걱정이 됬다. 그리고 그냥 일 자리는 곧 구할 건데, 이렇게 무례함을 다 받아줘야 하는 건지 서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집을 구하는 동안 이런 취급을 계속 받아야한다니 암담하게 느껴졌다. 사실 무직상태라는 말에 여러번 뷰잉이 취소되기도 했다. 아예 뷰잉도 안 잡아주는 업체도 많았고. 집 구하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집도 내가 살던 곳에 비하면 진짜 별로인 상태면서. 여기선 난 이런 대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거구나.
내가 돈을 내는 입장인 집 구하기도 이리 쉽지 않은데, 돈을 받을 잡 구하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이것보다 더 심한꼴을 보려나? 우울함에 저녘 먹을 생각도 안나고 그냥 누워있었다. 윗 침대의 인도 남자애가 왜 밥을 안 먹냐며 오렌지를 건내줬다. 그 오렌지 반쪽이 내저녘이었다. 다이어트엔 마음고생만한게 없다는데, 계속 이런 상태라면 꽤 잘 빠지겠어요.
08.04.일_ 협상은 여유로운 쪽이 이긴다
점심까지 기운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누워만 있을 순 없었다. 수요일이 코 앞인데 방법을 찾아봐야했다. 유스턴쪽은 정말 분위기도 위치도 모두 완벽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집불통 그 루마니아 영감탱이와는 함께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집 조건은 매우 좋지만 에이전트(부동산)도 없어서 사기의 위험성이 있는데다, 집주인이 들어가기 전부터 이렇게 난리를 치는데. 지내는 내내 맘이 불편한 채로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제외하기로 했다.
고민 끝에 어제 뷰잉한 곳 중에 모스크사원 근처 집으로 결정했다. 같은 가격에 넓고 깨끗한 시설을 쓰는게 좋으니까. 게다가 보증금도 한달 치만 주면 되고 집세도 선납하면 되서 조건도 괜찮았다. 세번째 뷰잉했던 집은 시내까지 교통편이 불편했다. 계약조건도 3개월치 집세선납과 1개월치 보증금을 요구했다. 뭐 앞 전의 루마니안 랜드로드처럼 니가 일 못구하면 못주니 마니 하진 않았지만.
바로 계약을 해야겠다 싶어서 부동산으로 찾아갔다. 뷰잉을 다니면서 생긴 편견은 인도인들은 정말 시간개념이 여유롭다는 거다. 만나자고 한 시간 정각에 나오는 일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뭐 내가 을이니 어쩌겠어. 근처 가게를 구경하며 그를 기다렸다.
인도 출신이라는 그는 매우 친절했다. 특유의 능글맞음으로 계속 삼성, 엘지, 현대 등으로 스몰토크를 꺼내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을 넣으려고 하는 데, 갑자기 유스턴쪽 랜드로드에게 전화가 왔다. 좋은 소식이라며 대리인이 내일 시간이 되서 계약도 진행할 수 있고, 보증금도 1개월치만 받겠다고 했다.
어제까지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그는 이제 세상 순한 사람이 되어 계약에 대해 나긋나긋 알려주었다. 너가 말한 것처럼 잡이 없기때문에 그 집을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다른 사람과 계약해도 된다고 말하자, 왜 그렇게 마음이 바뀌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너 때문인걸 모르는 척 하지 왜- 자기는 대리인이 시간이 될 지 몰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부동산에는 계약서가 영어라 한번 더 검토해보겠다고 하고 나왔다. 인도 중개인은 무슨 일이냐며 에어비앤비 때문이냐고 날짜를 조정해주겠다고 했지만 일단 두 조건을 고려해보기 위해 나왔다. 그는 시간을 천천히 갖고 잘 생각해보라며 괜찮다고 했고, 대리인이 한동안 런던을 떠나있어야 해서 조급해졌는지 루마니아 집주인은 계약을 거절하는 내게 시간을 갖고 내일까지 천천히 생각해보라고 했다. 참나- 그 집에 들어올 사람들 많다고 소리지를 땐 언제고.
생각해보니 내가 조금 순진했다. 아무리 런던에서 집을 구하기 힘들다지만, 직업이 없는 신용 0점 자리 신분의 외국인이지만, 난 돈이 있다. 그 말인 즉슨 갑은 나라는 얘기다. 그리고 신분도 보증되있는데- 왜 이렇게 나를 낮추고 그런 무례를 참았을까? 직업이 없으면 안된다고 거부당하고 별 같잖은 이유로 모욕에 비슷한 비난을 당하던 상황에서 시간을 갖고 선택을 할 수 있는 위치로 바뀐 게 어이없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역시 협상을 할 땐 여유로운 사람이 이기는 법인데.
생각해보면 정말 별거 아니었다. 그냥 영감탱이가 소리지르고 무례하게 한 말인데- 유리멘탈인 나는 거기에 며칠을 서러워하고 밥도 잘 못먹었던 거다. 돈도 직업도 없는 탓이라고 죄없는 내 자신을 탓하면서.
내일이 되면 영국에 온지 거의 일주일이 되간다. 도착하면서 집 뷰잉까지 심각하진 않지만 작은 실망들이 있었다. 이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조금 덜 실망하고 덜 상처받을 것 같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단단해지는 과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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