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1.토 [워홀+165]_ 새 집, 새 보금자리
이사 온 지 이틀 째가 되서야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옷장부터 주방 붙박이장까지 수납공간이 넉넉하고, 넓진 않지만 식기를 건조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있다. 세탁기도 두 개라 훨씬 여유롭고, 샤워실 온수도 팡팡 나와서 너무 좋다. 주변환경 또한 맘에 쏙 들었다. 솔직히 뷰잉 할 땐 정신 없어서 몰랐는데, 알면 알 수록 정말 좋은 동네다.
장을 보러 가는 길. 비로소 내가 센트럴에 입성했다는 것이 실감났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부터 M&S, Wait-rose같은 고급 식료품점들, 한국 식료품점인 오세요까지. 심지어 유니클로나 H&M같은 잡화점까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대형 쇼핑몰은 물론 킹스크로스같은 기차역이나 웬만한 도심 관광지까지 걸어서 30분 내에 다닐 수도 있는 곳. 더 이상 뭘 사러 지하철을 타고 나갈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처음 간 식료품점 세인즈버리에서 두 종류의 사과를 샀다. 하나는 핑크레이디, 하나는 버번애플. 핑크레이디는 형광빛이 도는 핑크색에 우리나라 부사처럼 단단아삭하고 상큼하다면, 버번사과는 탐스러운 색깔에 과즙이 뿜어져나오는 백설공주의 사과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으론 버번 애플이 더 취향인 듯.
슴슴한 걸 선호하는 나와 달리 얘는 항상 뭘 뿌려먹는다. 누군가랑 가까이 지내다 보면 그 사람의 취향이 묻어나기 시작한다. 음식에 간 맞추는 것 부터 사소한 생활 습관까지, 그 사람이 살던 삶의 가닥이 내 삶에 조금씩 닿는 느낌이랄까. 누군가 사람을 만나는 과정을 'X' 자에 빗대어 설명한 적이 있다. 각자의 삶을 살아오던 두 선들이 가운데 맞닿는 점들을 통해 결국은 어떤 교집합을 이뤄내는 과정. 그 과정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시간이 꽤 싫지 않다.
01.12.일 [워홀+166]_속상함은 도미노처럼 와르르 몰려온다
오랜 만에 아침을 차려봤다. 요즘 누가 해주는 것만 매일 얻어먹기도 했고. 사실 뭐 재료도 없고, 한 거라곤 계란 볶고 과일 자른 거라서 딱히 요리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남 먹을 거 생각하며, 시간 들여 상을 차리는 게 보통일은 아니더라. 그동안 내 밥상 차려줬던 모든 사람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늦은 오후 쯤 다음 주 근무 일정이 나왔다. 일주일에 단 하루, 크리스마스 때 보다 적은 근무 시간이었다. 사정이 있다는 사장님의 한 마디. 나는 또 순순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약 한 달 째 촬영이나 편집 일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 줄어든 shift까지. 자꾸만 내 능력을 의심 받는 기분이 들었다. 줄어들 수입에 대해서도 조금 씁쓸해졌고.
분위기를 전환한다고 저녁엔 라피랑 외식을 하러 나갔다. 처음엔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분위기 레스토랑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인테리어에 음식 맛도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문 이후였다. 스타터 주문 이후 메인을 시키겠다고 말했는데, 웨이터들의 태도가 묘하게 변했다. 사실 배도 적당히 부른 상태였는데 점원들의 그런 태도에 더 주문하고 싶지 않아졌다. 매니저가 와서 계산을 받을 땐 왠지 모를 냉담함마저 느껴졌다.
몇 년 전 동유럽에서 겪던 인종차별이 생각났다. 마트에서 계산하려고 내민 카드를 내밀자, 캐셔는 내 카드의 서명이 영수증 서명과 다르다며 도둑 취급을 했다. 유럽을 반 바퀴 도는 동안 전혀 겪지 못한 일이라 당황스러웠고, 조금은 수치스럽기도 했다. 당시 백인인 지인이 와 서야 순순히 카드를 돌려주며 소동이 마무리 되었다. 그 때 느꼈던 수용하기 힘든 불합리함과 보이지 않는 차별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다니면 그렇다. 어려 보이는 얼굴, 또렷한 피부색. 전에는 없던 신분증 검사라던지, 이유 모를 출입 금지 등 은은하게 보이지 않는 차별의 대상이 되는 기분이었다. 잘못한 건 남인데 아무 죄 없는 괜히 그에게 볼 멘 소리를 해댔다.
게다가 예전에 알던 청소부까지 우리 얘기를 한다는 말에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왜 항상 나만 입에 오르내려야 하는가. 그럴만큼 크게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레퍼런스가 중요한 이 나라에서 평판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조심했던 시간들이 물거품이 된 기분이었다.
괜찮냐며 걱정하는 그를 보내고 집으로 들어왔다. 혼자라서 기분이 더 쳐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말 사소한 일들인데, 금전적인 이슈들과 맞물려 별 게 다 짜증나고 신경 쓰였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동안 밀린 일 들을 했다. 미루던 청소를 하고 생일부터 왔던 밀린 메시지들에 답장을 하다가 라이언의 문자를 발견했다.
근처에 와있으니 혹시 시간이 되면 만나자는 메시지. 오후 1시에 보낸 그걸 9시가 되서야 보다니- 정말이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떠나지 않고 동네를 배회하던 중이었다. 연달아 만나자던 연락을 거절했던 탓에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지난 번에 집안 일로 힘들어하던 그를 남겨두고 왔던 죄책감에 얼른 달려가 맥주를 한 잔 샀다. 사실 알러지약을 먹은 이후라서 술을 마시면 안되는데 까먹고 먹었다 후후...
두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고달픈 런던 생활, 조금은 심란한 한국의 정치상황, 다자 연애로 힘들어하는 지인의 얘기부터 진정한 우정에 관한 고찰까지. 더불어 새로 생긴 나의 인연에 대해 조언도 좀 구하고. 한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숨긴다는 죄책감이 있었는데, 털어놓고 나니 기분이 괜찮아졌다.
라이언과 헤어지고 나서 그 길로 라피를 만나러 갔다. 내가 없으니 모든 게 너무 다르게 느껴진다며 볼 멘 소리를 해대는 탓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 옛날 홀로 런던에 떨어졌을 때 사갈에게서 위안을 얻었던 나처럼, 비교적 정착한지 얼마 안 된 그에게 나란 존재가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 잘 알 수 있었기에.
사실 도착해서는 헛걸음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전 고지 없이 왔는데, 연락이 안 돼서 그냥 돌아가야겠다 싶었다. 여기까지 헛걸음을 한 것 같아 아쉬움을 안고 돌아가던 차에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라쉬가 나를보고 라피를 불러준 것이었다.
벙찐 얼굴로 뛰어나온 그를 보며 잘 온 게 맞나 싶었지만, 분명히 나쁘지 않은 기분임을 느낄 수 있었다. 늘 솔직하고 거리낌 없이 원하는 바를 말하는 줄만 알던 그도, 종종 아이처럼 '수줍음'을 탈 때가 있다. 이 전에는 미처 겪어보지 못했던 경험에 대해 어쩔 줄 모르는 날 것의 반응. 누군가에게서 받는 담뿍하고 꾸밈 없는 애정에 당황하면서도 본인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 낯설고 사랑스러운 감정에 어떻게 대처할 지 모르는 풋풋한 소년. 그게 바로 나의 라피였다.
우리는 잠깐 동안 공원 놀이터를 걸으며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여느 연인들처럼 아쉬운 이별을 했다. 문 하나로 서로를 넘나들던 거리는 이제 꽤나 시간이 걸려야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 아쉬움을 꾹꾹담아 헤어지는 길은 담백하지 못했다. 열 두시가 넘어 탄 버스는 집 까지 7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원래라면 40분이 걸릴 거리인데, 한산한 밤 거리가 이래서 좋은건가.
01.13.월 [워홀+167]_ 다른사람과 맞추어 나간다는 건
어젯 밤에 한동안 영영 못 볼것처럼 굴더니, 드디어 빔 프로젝터 왔다고 한달음에 헐레벌떡 달려온 녀석… 같이 개시해야 된다고 설레는 얼굴로 찾아온 녀석을 귀엽다고 해야할까.
사실 난 빔프는 오래 전에 졸업한 지 오래고, 조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와 지내는 시간 동안 너무 내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기때문이다. 조용히 밀린 일기도 쓰고, 가계부 정리도 하면서 할 일을 미뤘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다.
이런 내 맘을 눈치 챈건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와서 불편하냐는 그를 보며 아차 싶었다. 본인은 내향인이라 혼자만의 충전시간이 필요하다고 노래 부르던 그 녀석은 어디로 간 걸까. 울적할 때면 사람과의 시간을 통해 충전한다는 외향인인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 알던 서로의 모습과 정 반대로 작용하는 것 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면에서 그와 나는 많이 달랐다. 그는 사실과 결과를 추구하는 효율선호형 인간이며, 나는 굉장히 경험과 낭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장을 볼 때마다 이런 모습은 두드러졌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나와 달리, 그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필요한 아이템만 구매를 끝내는 효율추구형 구매자였다. 예전엔 엄마랑 동생이랑 이런 쇼핑을 자주 다니며 아이쇼핑에 단련이 되었다고 걱정말라는 우스갯소리를 해댔지만, 몇 시간이고 마트를 돌아다닐 수 있는 나는 그 본능을 억누르느라 조금 눈치가 보였다.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롭게 먹되 식사시간은 규칙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나와 달리, 시간에 구애받지 않되 식사주기나 칼로리를 제한해서 먹는 그의 식습관은 꽤나 큰 차이를 야기했다. 게다가 수면시간도 서로 달라서 새벽에 주로 활동하는 그와 달리 나는 밤이 되면 몽롱해졌다. 더군다나 요즘 알러지약을 먹느라 더 잠이 쏟아졌다.
결국 장을 보고 와서 골아떨어진 나를 두고 라피는 혼자 빔프를 뜯고 셋팅했다. 티를 내지않으려고 했지만 서운함이 뚝뚝 묻어나는 게 보였다. 여태껏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조용하고 감정적으로 덜 요동치는 편인데, 라피는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기분이다. 감정적으로 다채로운 젊은 혈기, 어쨋거나 그와 나는 여러모로 아직도 맞추어 나가야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01.14.화 [워홀+168]_자꾸만 남탓이 하고 싶어집니다
벌써 화요일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얘랑 있으면 딱히 뭘 하는 거 같지도 않은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내내 함께 붙어있어도 부족할만큼 서로에 대해 탐구하고 싶은 날들. 곧 사라질 것이란 걸 알기에 더 귀해지는 이 시간들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미뤘나.
벌써 여기 온 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약속된 2년 중 1/4가 지나갔는데 나의 자리는 불안정하다. 할 일을 미룬 건 나지 그의 탓이 아닌데 괜히 남탓을 하고 싶어졌다.
따뜻한 날씨에서 살던 사람답게 그는 내게 따뜻했다. 추위를 못견뎌 밖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영하 3도에 아이스크림 먹겠다고 맨발로 뛰쳐나가는 나를 끌끌대며 따라나섰다. 밥 차리는 게 귀찮다고 끼니를 거르면서도 내 식사는 잊지않고 챙겨주던 녀석. 그런 그가 좋으면서도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게 되는 내가 조금은 속물처럼 느껴졌다. 30대의 연애란 이런걸까.
01.15.수 [워홀+169]_ 간만의 고찰
오전엔 수영이와 통화를 했다. 오랫동안 미뤄뒀던 말도 하고 서로 안부를 건냈다. 이상하게 별 거인 일도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별 일이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성임이도 이만큼 한 것만도 잘했고 대견하다고 나를 북돋았다. 가끔 나의 안부를 물어주며 생사를 확인해주는 이들, 참 귀하게 느껴진다. 존재만으로 큰 버팀목이 되는 나의 소중한 존재들.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맞아 부지런을 떨었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하고 새밥도 지었다. 사실 하루 종일 먹기만 한 것 같다. 스트레스성 먹부림일 수도 있고. 일을 안 하니 식비가 엄청나게 드는구나.
주방에 있다보니 종종 새로운 이웃들을 만난다. 윗층에 사는 이니거는 대학생이다. 영국사람이라는데 이름이 생소해서 독일 사람인 줄 알았다. 터키에서 온 앨더는 직장인이라고 했는데 무슨 회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부산출신 한국인과 일 한다고 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우리 플랫엔 두 이탈리아인이 사는데, 두명 다 '로렌조'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내 옆방에 사는 로렌조는 남부출신으로 작은 키에 라틴 계열로 까만 피부에 큰 눈을 갖고 있다. 윗층에 사는 로렌조는 북부출신으로 큰 키에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모델같은 외모를 갖고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새로운 플렛메이트들에게서 맘에 드는 점은 출신에 관한 질문 방식이다. 중국인이냐고 묻는 대신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묻는 거. 전에 살던 곳에선 늘 나의 출신이 중국인이 아님을 증명해야했고, 그런 편협한 사고에 조금은 피곤하기도 했거든.
어쨋든 슬슬 일 자리를 더 알아봐야겠다. 한동안 이사나 새로운 관계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었다. 나의 새 보금자리에서 적절한 둥지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지.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년 1월 다섯 번째 일기 (01.19~01.23)_ 피어나길 기다립니다 (0) | 2025.01.24 |
---|---|
25년 1월 네 번째 일기 (01.16~01.18)_ 힘을 내요 미스 김 (0) | 2025.01.20 |
25년 1월 두 번째 일기 (01.05~01.10)_ 생일 그리고 이사 (2) | 2025.01.16 |
25년 1월 첫 번째 일기 (01.01~01.04)_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4) | 2025.01.05 |
24년 12월 마지막 일기 (12.31)_ 수고했어 오늘도 (6) | 2025.01.05 |